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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by 김민식pd 2020. 9. 14.

<화이트 호스> (강화길 / 문학동네)


대구 진책방에서 사온 책입니다. 채널예스에 올라온 강화길 작가님 인터뷰를 보고,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서점에 있기에 반가워 덥석 모셔왔지요. 


'너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그러니 말해보자면, 고모가 그 집의 악역이었다.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다른 가족들이 일하는 동안 본인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세어보는 사람, 사정 뻔히 알면서 너는 성적이 어느 정도이고 취직은 언제 할 생각이냐고 묻는 사람. 너 친구는 있니? 살이 너무 찐 거 아니야? 운동을 해라 운동을, 응? 그리고 몇 년 만에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이렇게 묻는 사람. 너는 아직도 용돈 받니? 우리 애는 이제 독립했는데, 너는 결혼은 안 해? 남자친구는 있니?' 


(9쪽)


아, 한 문장 한 문장 쿡쿡 찌르네요. 집집마다 꼭 한 사람은 있나 봐요.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나서 염장을 지르지요. ^^ 결혼 후, 첫 제사를 위해 시댁에 갔는데 고모가 물어요.

"그런데 애는 안 낳아?"

"네?"


남편은 분명 진중하고 속이 깊은 어른이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진상인가요? 당황합니다.

걱정인듯 염장지르는 소리들이 있어요.

"너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래?"

"너 때문에 내가 잠이 안 와."

이런 소리, 20대에 아버지에게 듣는 것도 억울한데, 

"도대체 애딸린 가장이라는 놈이 노조를 한다니 바보같은 짓이지."라는 소리를 나이 40에 집안 어른에게 듣는 건 유쾌하지 않았어요. 저는 부모님이나 주위 어른들의 기대에 맞춰 살 생각은 없어요. 그냥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겁니다. 부모님 눈치 보는 삶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내린 결론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스스로 생을 등지면서 부모님 기대에 못 미쳐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겼는데요. 친구들이 그 장례식에 갔더니 부모가 통곡을 하며 우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불편했대요. 그 부모가 아들을 사지로 몬 가해자 같았거든요. 

진정한 효도는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아닐까요? 자식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부모가 되고 싶어요.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자식에게 '너 때문에 내가 괴로워죽겠다.'라고 하는 건 그냥 어른의 갑질이죠. 

단편집의 첫머리에 나온 <음복>을 읽으며 알쏭달쏭했어요. 시작이 '넌 아무것도 모를 거야'인데요. 끝까지 읽고도, 뭔지 모를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놓친 게 분명 뭔가 있어! 싶어 처음부터 다시 읽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음.

아, 고모는 딸을 낳았고, 화자의 시어머니는 아들(화자의 남편)을 낳았어요.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했어요. 아들인 조카는 집안에서 많은 걸 누리고 살고, 더 똑똑한 자신의 딸은 오직 여자라는 이유로 괄시를 받아요. 그런데 조카는 아들로서 자신이 누린 걸 몰라요. 제사를 지내는 내내, 그냥 대접받고 살아온 대로 지내요. 고모는 그런 조카가 얄미워요. 그래서 조카 며느리에게 예민한 질문을 던집니다.

"애는 안 낳아?"

대단한 작가예요. 독자의 멱살을 잡고 흔듭니다.

'이런 것도 몰라서 어쩔래?'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 이게 책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책을 읽으며 많이 반성했어요. 표지 띠지에 '강화길은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 이야기로 어디에도 없는 장르에 이르렀다'고 나오는데요. 다 읽고 나니, 확 와닿는 소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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