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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이런 신박한 타임슬립이라니!

by 김민식pd 2020. 9. 9.

사람을 만나면 항상 물어봅니다. “그래서 요즘은 뭐가 재밌어요?” 이 질문 하나로, 상대에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요. 저는 몰랐던 재미를 발견할 기회를 얻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취미, 최근에 가 본 모임, 재미나게 본 영화나 책. 들어보고 마음이 동하면 저도 한번 시도해봅니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내 것으로 카피하는 거죠. 해보고 재밌으면 다음에 만나 그럽니다. “와, 진짜 재밌던 걸요? 감사의 인사로 오늘 밥은 제가 살게요.”
같이 드라마를 준비하는 작가와 대본 회의를 하다 물어봤죠. 
“최근 읽은 책 중 제일 재미난 게 뭐에요?” 
“<폐후의 귀환>이요.” 
“네? 그런 책도 있어요?” 
나름 재미있다고 소문난 책은 다 꿰고 있는데, 그 책은 금시초문이었어요. 
“서점에서 못 본 것 같은데?” 
“그 책은 서점에는 없어요. 전자책으로만 나와 있어요.” 
“저자가 누군데요?” 
“천산다객이요.” 
“어? 무협지 작가 이름 같은데?” 
“맞아요, 무협지랑 비슷한데 사극 로맨스 장르물이에요. 정말 재밌어요.”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철에서 검색해봤어요. 마침 1권이 무료 서비스 중이더군요. 전철에서 바로 다운로드 받아 읽기 시작했어요. 전자책은 이게 좋아요. 그 자리에서 바로 읽을 수 있어요. 

<폐후의 귀환> (천산다객)

소설의 첫머리에 황제의 부인인 황후 앞에 내시가 하얀 비단을 들고 나타납니다.
“이걸 목에 매고 자결하라고?”
기가 막힙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남편을 황제로 만들고, 태자까지 낳았는데, 이 인간이 배신을 때려요. 첩을 얻어서는 본부인을 폐위시켜 폐후로 만들고, 후실을 황후로 등극시킵니다. 그런 다음 첩에게 얻은 아들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역모 죄로 몰아 죽이려 해요. 오래전에 낳은 공주는 이미 목숨을 잃었고요. 갑자기 설움이 복받칩니다.
선대 황제에게 아홉 왕자가 있었어요. 그중 막내 왕자가 외모가 출장한 꽃미남이었어요. 대장군의 딸, 심묘는 꽃미남 왕자에게 반했어요. 왕궁으로 시집보내 달라고 아버지를 조릅니다. 대장군인 아버지는 반대합니다. 아홉 명의 왕자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 싸움이 벌어질 텐데, 병권을 쥔 대장군이 개입하면, 괜히 화를 입을 수 있거든요. 딸이 평범한 선비와 결혼해 집안의 평화를 지켜주기를 바라는데요. 사랑에 목을 맨 딸은 고집을 꺾지 않고, 집을 나가버려요. 결국 결혼을 허락하고요. 이제 꽃미남 막내 왕자가 무장 가문인 대장군의 사위가 되어 권력투쟁에서 승승장구하고 끝내 형들을 물리치고 황제가 됩니다. 
황제가 된 남편은 이제 안면을 바꿉니다. 외척의 힘이 강해지는 걸 경계한다는 이유로 대장군에게 병권을 빼앗습니다. 불만을 품은 대장군에게 반역을 꾀했다며 가문을 몰살시켜요. 그런 다음 황후를 폐위시키고, 태자에게 역모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폐후에게는 비단끈을 하사합니다. 목을 매고 자결하라는 소리지요. 
황제가 그럽니다.

“짐을 20년 동안 따른 정을 봐서 네가 온전한 시체로 남을 수 있도록 허락하마. 짐의 은혜에 감사하거라.”
“페하는 심가의 병권을 이용해 황위 다툼의 저울추를 자신에게 기울이려 하셨을 뿐이지 않습니까? 토사구팽이라더니. 강산이 안정되었다고 이런 배은망덕이 있을 수 있습니까. 폐하, 정말 흉악하십니다!”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갑니다. 내시가 직접 황후의 목을 조르기 시작합니다. 

‘최후의 순간, 그녀는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면서 소리 없이 독하게 맹세했다.
아들, 딸, 부모, 형제, 하인. 전부 억울하게 죽었다.
황제와 후궁과 간신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해쳤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들의 피로 이 억울한 한을 씻으리라.
태양은 지지 않는다지만, 내 반드시 너희의 빛을 꺼뜨려 버리리라!’

한스럽게 죽음을 당해 눈을 감는 폐후, 다시 눈을 떠보니 어릴 적 몸종이 자신을 조심스레 살펴봅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오래 전, 죽음을 당한 여종이 다시 나타나 말을 거는 걸 보니, 여기는 저승인가 봐요.

“죽기 전 환각인가 본데, 너무 사실 같은걸.”“아가씨, 무슨 말씀이세요? 연못에 빠져서 정신을 잃으셔서 의원을 불렀습니다.”

생각해보니 열다섯 나이에 연못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환각이라기에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거울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거울을 보니 그 속에 열다섯 어린 시절의 내가 있어요. 

20년 간, 황후로 살며 온갖 권력 다툼을 겪은 폐후가 죽음의 순간, 20년 전으로 타임리프해서 환생합니다. 이제 결심합니다. 다시 한 번 사는 인생, 이번에는 제대로 살아주겠어. 꽃미남 왕자에게 홀리지 않고, 내 가족을 지켜내겠어. 그리고 왕자에게 복수할 거야!

여기까지 읽었을 때, 1권 227쪽 중 겨우 20쪽이었어요. 서점에 들어가 보니 외전 포함 총 15권까지 나온 세트고요. 무협지나 로맨스물의 경우, 외전이 나왔다는 건 흥행에 성공했다는 얘기입니다. 재미없으면 시리즈가 빨리 끝나고, 작가는 얼른 다른 이야기를 기획하지요. 다 끝난 작품에 외전까지 만들었다는 건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지요. 1권 중간까지 읽고는 바로 인터넷 서점에서 시리즈 전체를 구매했어요. 한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전자책은 휴대폰으로 읽을 수 있으니, 내가 가는 곳이 바로 만화방이 됩니다. 네, 어린 시절에 저는 만화방에서 무협지를 즐겨 읽었거든요.

독서의 양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면, 재미난 책을 읽는 습관입니다. 물론 인문교양서나 고전을 읽는 것도 좋지요. 하지만 몸에 좋은 보양식이나 건강 식단만 고집하면 식욕이 떨어집니다. 가끔 군것질도 하고 길거리 음식도 먹어야 해요. 책도 편식하면 안 됩니다. 너무 어려운 책만 읽지 말고, 재미로 읽는 책도 있어야 해요. 저는 대여섯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데요. 흥미진진한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 소설을 항상 목록에 넣어둡니다. 교양서적을 읽다 재미가 없으면, 스마트폰을 들어 SNS를 하거나 게임을 하는데요. 저는 그럴 때 재미난 책을 펼쳐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을 읽습니다.

<폐후의 귀환>,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열다섯 어린 소녀인데, 그 머릿속에는 서른다섯 살까지 궁궐에서 암투를 겪은 황후가 있다면? 심지어 앞으로 20년 동안 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초능력 슈퍼히어로가 되는 거지요. 저는 책을 읽는 것도 남의 능력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 초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경험과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사는 건 판타지에서만 가능하지요. 저는 미래의 나를 소환하고 싶어요. 나이 90이 넘어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할 노인 김민식을 내 앞에 소환합니다. 그리고 물어봐요.
“제가 당신에게 건강한 몸과 시간을 드린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
90세가 된 김민식이 내게 바라는 그 일을 나는 오늘 할 겁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아보려고요. 
재미난 책 한 권을 읽는 것만큼 확실한 행복도 없습니다.

https://youtu.be/9b37Nzvw8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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