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오랜 팬으로 살아왔어요. SF가 그리는 그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좋아하거든요. MBC에서 영화감독조합과 손잡고 새로운 SF 드라마를 만든다고 했을 때, 팬의 자세로 기다렸어요. 그리고 그 첫번째 작품 <간호중>을 보고 원작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찾아 읽었어요. 

<깃털> (김혜진 / 허블)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작품집이고요. 드라마의 원작인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는 두번째 수록작입니다. 가까운 미래, 환자의 움직임을 도와주는 로봇도 생겨나지 않을까요? 그 간병 로봇의 고뇌를 다루는 이야기에요. 10년째 의식이 없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이 있어요. 어머님의 상태를 24시간 옆에서 돌볼 로봇을 구매합니다. 로봇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오랜 간병에도 지치지 않고 환자를 돌보니까요. 가망 없는 환자를 지켜보며 아들이 깊은 우울에 잠겨갑니다. 환자와 함께 보호자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던 로봇이 이상 징후를 감지합니다. 아들이 우울증이 깊어져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요. 순간 로봇이 오작동을 일으킵니다. 깨어난 로봇이 병상 머리맡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보고 <생명을 살리는 전화>에 연락을 해요. 상담하시는 신부님이 전화를 받습니다.

"저는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요."

"간병인이시군요."

TRS는 순간 자신이 로봇이라고 밝히고 싶지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을 놀리거나 우습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생명을 살리는 전화라고 쓰여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생명 하나가 죽어야 생명 하나가 산다면 어떡하지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환자가 죽어야 보호자가 산다면 어떡하지요?"

(...)

"제가 돌보는 환자의 보호자가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제가 의식이 없는 환자를 죽게 하고 보호자를 살리려고 하는데 기도와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최신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환자를 죽이지 마십시오. 형제님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 아닙니다."

"저는 환자의 하루하루를 살리고 있는데요. 죽음은 왜 안 된다는 거죠?"

(71쪽)

 

SF를 통해 가능성의 세계를 타진해봅니다. 미래에는 이런 것도 가능할거야, 나름의 논리 실험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의 경우, 윤리 실험이지요. 장수사회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고민입니다. 간병인의 딜레마.

드라마의 결말과 관계없이, 저는 간병 로봇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저는 평생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요. 그러니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자유를 주고 싶어요. 부모로서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건강하고 독립적인 노후가 아닐까요?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살게 하고, 저는 전문가에 의탁해 혼자 책을 벗삼아 늙어가고 싶습니다. 저의 병든 몸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보다 튼튼한 로봇의 도움을 받아 불편을 이길 수 있다면, 그 또한 복받은 노후라고 생각해요. 

책 마지막,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해요.

'작가의 말을 쓰려고 '작품들에 대한 간단한 메모'라는 이름의 파일을 열었다. 한 편씩 완성할 때마다 후기를 적어놓은 파일이다. 첫 문장이 "이제 그만 TRS에서 벗어나 다음 소설을 발표하고 싶다"였다. 잠시 그 문장 앞에 앉아 턱을 고였다. TRS를 정말 사랑하는데 수십 번 고쳐서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다음 작품을 발표하지 못해 TRS 곁에 주저앉게 될까 봐 걱정하던 마음이 되살아났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TRS가 먼저 나를 떠났다. 2017년에 쓴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가 2020년에 시네마틱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지금도 실감이 잘 안 난다. TRS가 왠지 멀리 가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하다. 'TRS야. 이리 와. 한 번 안아줄게. 힘내. 잘 가.'

(134쪽)

여러번 고치며 힘들게 쓴 작품이라는 게 글에서 느껴져요. 그게 느껴지니까 영화감독이 선택한 시나리오가 되었지요. 문득 이것이 나의 작별 메시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수없이 고쳐쓰는 시나리오처럼, 나의 육신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바탕이 되고요. 평생 열심히 살다, 때가 되면. '몸뚱아리야. 이리 와. 한 번 안아줄게. 힘내. 잘 가.'하고 안녕을 고하고 싶어요. 물론 그 때는 제 노후를 함께 한 간병 로봇이 곁에 있으면 좋겠고요. 그만큼 먼 훗날이기를 소망합니다. ^^

드라마로 보셔도 좋구요. 책으로 만나도 좋아요.

MBC 드라마 <SF 8>의 원작을 만날 수 있는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시리즈, 기대만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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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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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솔 2020.08.20 0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병 로봇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간병 로봇이 있다면 노후가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기술이 인간의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로봇을 고용할 돈은 벌어놔야 하겠지만요~ㅎㅎ

  2. 김주이 2020.08.20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소개로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고 이 글을 보니 간병로봇의 존재가 잘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보리랑 2020.08.20 08: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바램은 딸래미들을 피디님처럼 힘있고 즐겁게 살게 도와주고, 내힘으로만 살다가 가는 겁니다. 너무 큰 희망인가요?

  4. 섭섭이짱 2020.08.20 0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처음에 MBC에서 SF 드라마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는
    야호~~~ 드디어 김민식 피디님이
    좋아하시는 SF 소설로 드라마 연출하시나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가사 보고는 얼마나 아쉬웠던지😔

    이미 일본에서는 다양한 간병로봇이 개발되고 있다고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데...
    간병로봇이 일반화된 세상이 언젠가는 올거 같은데...
    그래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마지막까지 보내고 싶네요.

    피디님.
    간병로봇이 필요 없도록 노후에도
    에너자이저로 건강하게 지내셔서
    꾸준히 책도 내시고 강연다니시고
    꼬꼬독 영상도 계속 찍으셨으면 좋겠어요.

    피디님 항상 몸 건강하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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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꿈트리숲 2020.08.20 09: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간병 로봇이 있다면 아플 때 가족에게
    덜 미안해하며 아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족들은 바쁜 일상 단절없이 마음의
    부담도 덜 수 있고요. 기술발달이 여러모로
    도움을 줍니다.

    예전엔 가족 이외에 다른 사람이 간병을
    하는 건 불효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요양보호사의
    간호를 받는게 익숙해진 것처럼, 간병로봇도
    그렇게 되는 시대가 곧 올 것 같아요.

    SF소설이 미래를 성큼 다가오게 만들고
    SF드라마가 미리 미래를 그려줘서
    시행착오 없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 나올 피디님의 로코 드라마 기다립니다.
    전 로코 취향이라~~

  6. 휘게라이프 Gwho 2020.08.20 2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ㅎㅎ

  7. 아빠관장님 2020.08.22 2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간병로봇이 저를 돌봐주기를 바랍니다.
    혹시 있을 저의 긴 병수발에 저의 아이들이 저를 미워하게 되지 않도록요. 제가 그랬던 거처럼 말이죠....

  8. 아프리칸바이올렛 2020.08.24 0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마도 내가 간병하기 전이였다면
    위 소설은 쓱 읽고 지나갔을겁니다
    지독한 섬망을 겪은 후
    제발 살아만 주세요 했던 마음에
    함께 살아갈 두려움과 걱정이
    생겨나네요
    숨기고 싶을만큼 나의 민낯에 당황했고
    많은 갈등이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