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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짠돌이 육아 일기

나는야 장발장 스타일

by 김민식pd 2019. 11. 26.

촬영장에서 드라마 감독은 어떻게 일할까? 대본, 연기, 앵글,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고 머릿속의 그림이 눈앞에 구현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카리스마의 화신? 적어도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촬영하기 전에 배우에게 물어본다. “이번 씬 연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리허설을 보고 마음에 들면, 촬영감독에게 물어본다. “이번 씬 촬영, 어떻게 할까요?” 대부분의 경우, 배우와 스태프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전문가들에게 자율성을 주고 각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맡긴다. 남들 하자는 대로 다 쫓아간다고 무골호인 스타일이라 흉볼 수도 있는데, 나는 이게 ‘장발장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궁금했다. 바리케이드를 찾아간 장발장은 왜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지 않았을까? “내가 코제트 애비일세. 딸이 자네 걱정으로 잠도 못자고 괴로워한다네. 나와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세. 우리가 여기서 둘 다 죽는다면 내 딸 코제트는 외롭고 불쌍한 고아가 된다네. 살아서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는 게 진짜 사랑 아닌가? 자, 나랑 같이 집으로 가세.” 이렇게 말했다면 마리우스를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생 끝에 바리케이드에 잠입한 장발장은 시민군의 일원이 되어 마리우스를 지켜본다. 군대의 공격에 학생들이 죽음을 당하고 마리우스가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 되어서야 그를 들쳐 메고 파리 시민의 오수로 가득한 하수도를 걸어 탈출을 시도한다. 어렵게 살려놓고도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생명을 구한 은인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기다리며 늙어간다. 장발장은 왜 그랬을까?

장발장이 마리우스를 설득해서 함께 도망쳤다면, 마리우스는 행복했을까? ‘내가 동료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는 없을까? ‘나 하나 남는다고 싸움의 양상이 바뀌기야 했겠어? 살아남는 게 최선이지.’라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을까?

장발장은 자유의 가치와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그는 타인의 자유의지도 존중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뒤를 지키는 일이다.

드라마 촬영에서 배우는 며칠씩 대본을 보며 열심히 준비한다. 동선, 표정, 대사를 오랜 시간 다듬는다. 3일을 준비한 연기를 감독이 현장에서 뒤집으면 배우는 고민에 빠진다. 3일간 연습한 것과 현장에서 5분 만에 바꾼 연기,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울까? 방송을 보며 후회할 것이다. ‘아무리 봐도 저건 아닌 것 같은데?’ 배우와 연출 간에 상호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감독이 직접 캐스팅한 배우이니, 그의 선택을 믿고 따라가는 게 최선이다.

이 때, 나는 결과에 대해 온전히 책임 질 준비가 되어있다. 드라마가 부진의 수렁에 빠지면, 나서야할 때다. 빈사 상태에 이른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도를 걸어가는 장발장처럼, 부진에 빠진 드라마에 대한 모든 비난을 짊어지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혼자 걸어간다. 그게 드라마 감독이 사는 방식이다.

87년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 나는 문과를 가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공대 진학을 강요했다. 자유의지를 꺾고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결과,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괴로웠다. 가지 못한 길은 내게 천추의 한이 되어 남았다. 삶의 선택을 타인에게 맡기고, 그 결과를 감당하며 사는 삶은 지옥이다.

얼마 전 큰 아이가 수능을 치렀다. 진로 선택에 있어 기로에 선 아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나는 훌리건이 아니라 팬이다. 아무리 선수를 사랑한다고 해도 경기장에 난입하는 훌리건이 될 수는 없다. 심판을 폭행하고 선수에게 욕설을 퍼붓는 훌리건. “아까 슛을 쐈어야지, 왜 패스를 하고 그래?” 그건 참된 팬의 자세가 아니다. 아이에게는 스스로 삶을 선택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 아이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의 선택을 믿고 따르련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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