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TV에서 노래 실력을 뽐낼 기회가 많지 않던 시절, 공중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 출연 여부는 인지도와 음반 판매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길게 출연하기 위해 매니저들이 제작 회의실 복도에 아침마다 줄을 섰다. 출근하는 피디의 위세는 입궐하는 왕의 행차 같았다.

 
어떤 선배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맡게 된 날, 마음속 고이 간직해둔 살생부를 꺼냈다. ‘조연출 시절, 섭외할 때 나를 힘들게 한 매니저가 누구더라?’ ‘인터뷰 촬영 협조 안 해준 그 배우, 소속사가 어디더라?’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맡는 건, ‘절대 반지’를 손에 넣는 것 같다. 누구든 손봐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 반지’. 멀쩡한 피디가 권력을 손에 넣는 순간, 골룸이 되는 걸 보고 1987년의 여름이 떠올랐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자전거 동아리에서 전국일주를 했다. 가장 아름다운 코스는 동해안 7번 국도였다. 포항에서 속초까지 달리는 동안 오른쪽에는 동해 바다, 왼쪽에는 태백산맥이 펼쳐졌다. 페달을 밟아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갯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달렸다. 당시엔 동해안에서 서울로 가려면 한계령을 넘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을 오르는데 3시간 걸렸다. 허벅지 근육이 터지는 줄 알았다. 겨우 정상에 도착하니 한계령 휴게소 주차장에서 동아리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정말 장하다! 한계령을 자전거로 오른 너희 인생에 이제 한계란 없다.” 이따위 드립을 치더니 단체 기합을 줬다. 왜 그랬을까?


싸이클을 타고 한계령을 오르는 건 힘은 들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오르막에서는 속도가 나지 않으니까. 문제는 내리막이다. 고생 끝에 정상에 올랐다는 도취감에 빠져 스피드를 즐기다보면 급커브 구간에서 바퀴가 밀려 대형사고로 이어진다. 단체 기합을 주며 선배가 말했다. “자전거 타고 산에 오르니까, 신나지? 이 즐거움을 오래도록 지속하려면, 스피드에 대한 욕심을 줄여야 한단다.”

나이 50이 넘어 그날의 한계령을 떠올릴 때가 많다. 방송사 피디로 일하며 한 방에 훅 가는 이들을 많이 본다. 오랜 세월 무명으로 고생하다 간신히 스타가 되었는데 사고 한 방에 사라진다. 신인 시절은 오르막이다. 사고가 안 난다. 사고 칠 힘도 없고, 사고를 쳐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문제는 정상에 오른 후다. 고생 끝에 떴으니 인생을 좀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대형 사고가 터진다. 뜨는 것보다 어려운 건, 뜬 다음 자기 관리다.

한때 골프에 빠진 적이 있다. 미국 유학 중인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는 휴가 한 달 동안 라운딩을 스무 번 넘게 나갔다. 양말 신은 부위만 빼고 종아리가 새카맣게 탔다. 아내가 미국에 전지훈련 왔냐고 했다. 한국에 업무 복귀하고 골프 친다는 소문이 나니까 여기저기서 주말에 라운딩 가자는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좋은 시간에 티오프를 잡았다고 해서 나가보니 연예제작사 대표나 매니저가 물주였다.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곧 나의 약점이로구나.’ 골프를 끊고 주말에 한강에 자전거를 타러 다녔다.

 

당 태종에게는 위징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평소 직언을 잘 하던 그가 죽자 “내가 잘못을 해도, 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으니, 짐은 이제 거울을 잃었다”고 통곡할 정도였다. 당나라를 세운 후, 당 태종이 ‘창업과 수성, 어느 쪽이 어려운가?’라는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 위징이 말했다. “창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군주에게 교만이 싹트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창업은 차라리 쉽다. 욕망을 원동력삼아 열심히 달리면 된다. 중요한 건 정상에 오른 다음이다. 내리막길에서 달리고 싶은 욕망에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오래 지속하는 즐거움을 만드는 길은 거기에 있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실은 칼럼입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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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아리짱 2019.10.29 0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피디님의 삶의 지혜에 존경을 표합니다.


    피디님의 겸허한 삶의 자세 배우고 또 배우겠습니다.

  2. 보리랑 2019.10.29 0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골프를 끊은 이유가 있으셨군요 ㅠㅠ 이제사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우리나라 엘리트들이 쉽게 무너지는 이유가, 큰 권력을 쥐면 뭐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라네요.

    부모라는 권력도 참 무서워요. 딸들에게 자주 지적당하는데, 때론 맑은 영혼들이 뭘 지적하는지 파악도 안된다는 ㅠㅠ

  3. 오달자 2019.10.29 0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만을 싹트지 않게 하는 법이 어렵다."

    오늘 아침 허를 찌르는 한마디이십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죠.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하고 자만에빠지기 쉽다는걸~^^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삶을 사사는 피디님의 삶을 대하는 자세.
    존경합니다~^^

    오늘 하루도 생애 최고의 날 되소서~~^^

  4. 눈부은날 2019.10.29 08: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아침입니다!
    출근하여 오늘 포스팅을 읽고 한번 더 마음을 다잡게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5. 달밝은밤 2019.10.29 0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많을걸 생각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참! 유튜브도 잘보고 있어요^^

  6. 나겸맘 리하 2019.10.29 09: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계령 정상 주차장에서 기합 준 선배는 당시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십대였겠죠?!
    내리막의 위험을 그때부터 알고 계셨으니 계속해서 경계하는 삶을 사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교만과 겸손은 순환하는 관계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교만해서 무릎 꺾이고 고개 조아려 본 사람이
    힘든 시기 지나 깨달음을 얻으면 자연스레 겸손해지기도 하니까요.
    나이들면서 가장 좋은 건 이전까지 안보이던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 어렵다는...골프 끊기. 피디님의 결단력은 세심한 자기관찰의 증거같습니다^^

  7. workroommnd 2019.10.29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다 한방에 훅간다~ 는 말이 괜한말이 아니네요~

    오늘도 좋은글 감사히 읽었어요~

    영백기 입으로 말하기 25%정도 복습중이에요~~
    이제 제목만 보면 술술 나오는 과는 한 20%되는데. 하~ 이게 진짜 100% 달성되면
    다음코스로 넘어갈려고 하는데, 엄청 안나가네요.ㅠ

  8. 새벽부터 횡설수설 2019.10.29 1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좋네요. 오랫동안 재미를 느낄려면 속도를 조절할줄 알아야 한다는 말.. 수성이 중요하다는 말..
    맞는 말입니다. 요즘 사회 연예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우리를 잘 돌아봐야 함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9. 루스 2019.10.29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누구나 정상에 오르면 탐욕에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습니다.
    진실되지만 아픈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것 같습니다.

    듣는 순간 그 순간은..하지만 너무 아파요. ㅠㅠ

  10. 섭섭이짱 2019.10.29 12: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저를 되돌아보게 되는 글이네요.

    교만, 오만, 거만, 자만......

    이런 마음이 싹트지 않도록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삶을 살도록 해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겸손은 미덕 중에서 가장 터득하기 힘든 덕목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보다 더 없애기 힘든 것은 없다.
    - T.S. 엘리어트-
    -------------------------------------------------



  11. 아프리칸바이올렛 2019.10.29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고 가슴 깊이 새겨요
    이 글은 캡쳐해서 자주 읽으면서
    교만이 들어오지 못하게 부적처럼
    지닐까 해요

  12. 더치커피좋아! 2019.10.29 12: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기가 또 제몸에 들어와
    몸의 겸손함을 가르쳐주네요.
    쉬어가는 하루!
    피디님~파이팅!^^

  13. 아빠관장님 2019.10.29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구절절 와닿습니다...

    한 달간 20번의 라운당이시면 정말 빠지셨던 상태일 텐데, 그걸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싹! 그만둔 피디님의 결단력, 의지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것들 또한 독서에서 비롯된 것인가요~?

    그리고 그 한계령의 그 선배 일화를 들을 때마다 저는 참.. 그 선배라고 해도, 20대일 텐데... '어쩜 저리도...'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도 20대 초 입대 전 자전거로 서울서 제주를 한 번 갔었는데, 내리막이면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자전거처럼 달렸거든요^^;;;; 지금 멀쩡하거 살아있음을 감사해야죠^^;;/

  14. 인풋팍팍 2019.10.29 14: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이 글 안읽었으면 어쩔뻔!!

    제 삶을 보면 어떤 부분이 늘 도돌이표더라고요
    왜 그럴까..왜 그럴까 보니
    자만하고서 잘난척 하는 순간 멈췄던 거에요.
    착각에.....흐흐...


    피디님 글 읽으니 마음이 잔잔해져요

    감솨합니다!!!

  15. 하루하루 2019.10.29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등산하다가 호되게 혼난적이있습니다 올라갈때는 힘이드니 천천히 올라가다 내리막길에 쉽게 내려가다 다리가 풀려 다칠뻔했습니다 내려갈땐 더 힘을주어 조심히 내려가야한다는걸 알았습니다 다시한번 겸손과 욕망을 제어할수있는 마음가짐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