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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사람은 길 위에서 만들어진다

by 김민식pd 2019. 5. 8.

어렸을 때, 나는 소심한 왕따였는데, 어느 순간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했습니다. 그 계기는 아마 여행이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 학교 친구나 부모님이 하는 말에 상처받곤 했는데, 여행을 다니며 상처주지 않는 관계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길 위에서 만난 친구들은 다들 즐겁고 행복해 보였고요. 내 삶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어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고 획일성만 강요하는 한국 문화에 대한 내성을 기르게 되었지요.

지난 번에 소개한 노동효 작가의 <남미 히피 로드>.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작가님의 멋진 사진 솜씨 덕에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남미의 풍경도 좋았어요. 남미의 풍경이 낙원처럼 그려지는데요. 그 이유는, 작가님이 만나는 숱한 여행자들 덕분입니다. 시를 쓰고,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곡예를 하는 히피들의 삶을 보면, 삶에서의 욕심을 좀 더 내려놓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요. 내 마음의 여유가 한 줌 생기는 그 순간,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저는 책 속에서 천국을 발견하곤 해요. 노동효 작가가 만난 이런 멋진 사람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그들은 길 위에서 만들어집니다. 훌륭한 위인은 다 길을 떠난 사람이에요. 


'인간은 여행을 하고, 여행은 인간을 만들어냈다. 여행이 만든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처, 예수, 공자 등 성인들 외에도 바이런, 다윈, 헤밍웨이, 에릭 호퍼 같은 시인, 박물학자, 소설가, 철학자 등 인물군은 다양하다. 그리고 여행은, 혁명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사르트르가 극찬했던 이 혁명가는 첫 번째 남아메리카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셀리아가 낳은 첫 아이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2살 되던 해부터 천식을 앓았다.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을 겪을 때마다 어미는 대신 앓아줄 수 없다는 아픔을 느꼈다. 맑은 공기를 찾아서 이사를 다닌 덕분일까, 아들은 건강하게 자랐다. 독서와 더불어 럭비, 수영 등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아들이었다. 


스물세 살이 되자 아들은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떠났다. 아르헨티나를 벗어나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아들은 틈틈이 편지를 보내왔다. 떠날 때만 해도 다른 나라에 간다는 생각에 설레기만 했던 아들이 점점 진지해졌다. 그리고 아들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예전의 아들이 아니었다.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들은 안락한 삶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곤 불의한 권력에 대항해 총을 들고 싸우는 무장혁명가가 되었다.

(위의 책 84쪽)


네, 남미가 낳고, 전세계가 사랑하는 혁명가, 체 게바라 이야기입니다. 영화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로도 소개된 적이 있지요. 길을 떠난 사람은, 길 위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요.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만인에 대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영어를 공부할 땐, 그냥 출세의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여행을 다녀보니까, 즐거운 소통의 도구더라고요. 영어를 공부한 덕에, 잔지바르 스파이스 투어도, 파타고니아 승마 트레킹도, 아르헨티나 스카이다이빙도, 즐길 수 있었어요. 다 영어로 진행되는 투어니까요. 이후, 저는 가고 싶은 나라가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나라 말부터 먼저 배웁니다. 이 또한 여행을 통해 만든 습관이에요.


체 게바라의 혁명 동지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지요. 오랜 세월 미국과 대립해온 그에게, 누가 미국과 화해를 하고 문호를 개방할 생각은 없는지 물었대요. 카스트로의 답.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고, 라틴 아메리카인이 교황이 되면, 미국과 악수하고 세계로 문을 열 거야." 물론 피델이 그 말을 내뱉었을 때만 해도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기에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랬는데 2008년 11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당선됐다. 쿠바인은 "이게 뭔 일이야?" 하고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5년 뒤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출됐다. 쿠바인은 제 머리를 잡고 소리쳤다.

"오, 디오스(신이시여)!"'

(319쪽)

이제는 쿠바도 개방을 하고, 여행자의 천국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노동효 작가의 <남미 히피 로드>를 보니, 저도 쿠바에 가고 싶어집니다. 내가 모르는 쿠바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요. 체 게바라의 행적도 되짚고, 헤밍웨이의 단골술집도 가고 싶네요. 책을 읽는 동안 마구 설렙니다. 좋아요, 이런 설렘. 언젠가는 이 설렘이 제게 새로운 여행의 동기가 될 것이니까요. 


언젠가는 나도 남미에서 방랑을 즐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되고, 

라틴 아메리카인이 교황이 되는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 전에 책으로 방랑을 연습할까 합니다.


읽는 사람을 낙원으로 이끄는 책, <남미 히피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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