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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굽시니스트의 진정한 포텐

by 김민식pd 2019. 1. 14.

<시사인>을 몇년 째 구독하고 있어요. 제게 잡지 <시사인>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굽시니스트 만화가 나오기 전과 만화가 나온 다음. 처음 받아든 날, 최신 이슈부터 쭉쭉 읽다가 굽시니스트 만화까지 갑니다. 이 만화를 봐야 잡지를 놓을 수 있어요. 다음에 잡으면 끝부터 역으로 올라옵니다. 시사인 후반부에는 주로 새로 나온 책 소개나 '장정일의 독서일기', '활자의 영토'같은 글이 있어요. 책벌레가 총애하는 지면이지요. 다음에 읽을 책을 찾습니다. 그러다 다시 굽시니스트의 만화를 만납니다. 또 읽어요. 굽시니스트의 만화는 행간에 숨겨진 개그 코드가 있어 읽을 때마다 새로운 웃음을 찾는 재미가 있어요.

시사인 연재 만화 모음집, <박4모>를 좋아합니다. <박근혜 4년 모음집>의 줄임말이지요. 시사만화는 시의성을 탄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한 방에 날리는 작품이 나왔어요. 

<본격 한중일 세계사> (굽시니스트 글. 그림 / 위즈덤하우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합니다. 학습만화의 새 장을 여는 작품이라 해야 할까요? 감히 학습만화라 부르기 민망합니다. 이건 그냥 사극 그래픽 노블입니다. 어떤 특정 역사 속 인물이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주인공인 그래픽 노블. 한국은 호랑이로, 중국은 판다로, 일본은 고양이로 표현하는데요, 다 재미있어요. 한국은 세계사로 볼 때 중국과 일본이라는 아시아의 양대 강국 사이에 낀 신세입니다. 그로 인해 역사적으로 많은 불행과 고통을 겪어야 했고요. 책을 읽다보면, 한반도의 운명이 쫄깃쫄깃하게 펼쳐집니다.

1권은 '서세동점의 시작'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어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진입이라는 해일 앞에서 한 중 일 삼국은 어떻게 발버둥쳤는가. 프롤로그 '짬뽕의 기원'을 보면, 우리가 좋아하는 짬뽕은 한중일 삼국 근대사의 산물입니다. 1899년 일본 나가사키에 중국인 유학생이 많았는데, 화교 한 분이 가난한 유학생들을 위해 요리에서 남은 잔반을 활용해 면을 만듭니다. 닭 뼈다귀로 육수를 우리고, 채소와 해산물 찌그러기를 볶은 거죠. 이게 나가사키 짬뽕의 기원이고요, 화교 네트워크를 통해 일제강점기인 조선에 들어와 고춧가루와 고추 기름이 더해져 붉은 짬뽕이 되었어요. 짬뽕의 유래를 통해 저자는 3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9세기 말, 어째서 중국인 유학생이 일본에 많았을까?

왜 하필 나가사키였을까?

화교 네트워크는 어떻게 조선까지 뻗었을까?

만화의 형식을 빌어, 역사적 궁금증을 시종일관 재미나게 풀어갑니다. 제가 감탄했던 대목은 산업혁명의 기원을 설명한 '면 테크 전성시대'였어요. 16세기에 양모로 짠 옷을 입던 영국인들은 면화솜으로 만든 면 옷을 접하고 반해버리죠. 양털보다 면화솜이 더 가볍고 편안하니까요. 17, 18세기에 인도에 진출한 영국 상인들이 싼 가격에 면직물을 들여오는데요. 그 바람에 영국 모직물 산업이 망할 위기에 처해요. 결국 산업 보호를 위해 인도산 면직물 수입 금지를 단행합니다. 정부와 귀족들이 죄다 양 목장주들이었나 봐요. 

면직물이 수입 금지 되자, 면화를 수입해 영국에서 직접 국산 면직물을 만듭니다. 근데 옷감을 손으로 짜기가 귀찮아 베틀을 업데이트합니다. 면직물 짜는 방직기가 나온 거죠. 기계로 면을 찍어내니 실이 부족해요. 목화 섬유로 실 뽑는 기계를 만듭니다. 이제 실이 남아도니 더 빠른 방직기를 만듭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미친 생산량이 나옵니다. 인력으로 돌리던 방직기를 기계로 돌립니다. 기계를 만들자니 철이 부족하고, 코크스 공정으로 석탄에서 강철을 뽑아내니 이제 석탄이 부족해요. 영국 각지에 탄광이 만들어지고, 탄광에 고인 물을 빼내려고 증기기관 펌프를 만듭니다. 이렇게 혁신 -> 생산 증대 -> 부의 팽창 -> 재투자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물론 산업혁명이 이처럼 단순히 도식화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지만, 만화를 보며 컷컷의 재미난 전개에 빠져있다보면 역사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굽시니스트가 시사풍자 만화의 고수라 생각했는데요. 역사만화도 참 잘 그리네요. 신통방통해서 저자 소개를 다시 보니, 이분 외대에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후, 성대 역사교육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땄어요. 역사 만화를 통해 이분의 전공이 포텐 터지는 군요. 제가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를 쓰면서 그랬거든요. '아, 이 책을 쓰려고 20대에 그렇게 미친 듯이 영어를 공부했나 보다.' 굽시니스트는 이 만화를 그리려고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나봐요. 만화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쉽게 설명하고 교훈을 재미나게 알려줍니다. 

역사 덕후가 만든 최종 병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일단 한번 잡아들면 놓기 힘듭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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