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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책벌레를 위한 독서 예찬론

by 김민식pd 2018. 3. 29.

가끔 책에 환장한 것 같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만나기 가장 쉬운 곳이 역시 책이지요. 그런 이들은 책에 대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자신이 책을 쓰고 말고, 그 책에는 자신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지 절절한 사랑고백이 담겨 있거든요.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조 퀴넌 / 이세진 / 위즈덤하우스)

1장의 제목부터 확 와닿습니다. 

'책만 읽고 살면 소원이 없겠네.'

^^ 제가 그렇거든요. 책을 쓴 이가 어떻게 책을 읽는가, 처음부터 나옵니다. 


'나는 집과 사무실, 기차, 버스, 비행기, 공원과 개인 정원처럼 으레 독서를 할 만한 장소에서 책을 읽지만 경기장, 연주회장, 상금이 오가는 권투 시합장에서도 독서에 심취하거니와 딱히 휴식 시간에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주정뱅이 유치장에서 풀려나오기를 기다릴 때, 무릎 반월판 치료를 기다릴 때,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깨어나기를 기다릴 때, 아이스맨이 오기를 기다릴 때에도 나는 책을 읽는다. 나는 한밤중에 홀로 탄 지하철에서 객차 저편 끝의 밑바닥 인생을 외면하느라 책으로 얼굴을 가린 적이 한 번 이상 있다. 나는 슈퍼마켓에서 줄을 설 때, 배심원 선정을 기다릴 때,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는 사람의 초상집에서 밤을 새울 때 들춰볼 수 있는 책을 항상 들고 다닌다. 나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지만 화장실에서만은 예외다. 끔찍하게 형편없는 작가라면 모를까. 그건 내가 읽는 작가에게 더없이 무례한 모욕이다.'

(위의 책 10쪽)


이건 완전 제 이야기입니다.

저도 집과 사무실, 기차, 비행기, 공원과 등산로처럼 으레 독서를 할 만한 장소에서 책을 읽는데, 심지어 버스타고 30분 걸리는 곳에 굳이 전철로 1시간을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버스에서는 멀미탓에 책을 못 읽고, 전철은 타는 순간 독서실로 바뀌거든요. 2012년에 MBC 노조 집행부로 일하다 구속영장 청구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 영등포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을 때도, 책장에 꽂힌 책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어쩌면 몇 달 간 실컷 책만 보다 나갈 수도 있겠구나!'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책만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었어요. 그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좀 중증 환자같아요. 한밤중에 홀로 주조정실에 앉아 TV 화면을 모니터하다 100분 토론에 나온 정치인의 얼굴을 외면하느라 책으로 얼굴을 가린 적이 수없이 많아요. 이명박근혜 정권의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책 속 세상으로 달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이 계속 되면 이민을 가야하나 고민했는데요. 이민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영어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걸 보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 블로그에 영어 공부법을 올리기 시작했지요. 타인의 국외 도피를 돕기 위한 영어학습서를 쓰는 게 저에겐 현실 도피가 되었어요.^^

책 읽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고 싶어서'라는 저자의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아무리 좋은 곳에서 즐거운 일을 하며 살아도 우리는 늘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꿉니다. 어디에 있든 현실 도피의 최고 수단은 독서지요. 물론 마약이라든가, 도박이라든가, 현실 도피를 위한 다른 수단이 있는 건 사실인데요. 지속가능한 즐거움을 주는 건 그래도 독서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돈 한 푼 안 들고 중독을 지속할 수 있거든요. 다른 종류의 중독은 이게 힘들어요. 갈수록 빈도와 강도를 높이다보면 한 방에 훅 갈 수 있어요. 활자중독은 그나마 그런 위험이 적다는... 



책에 감히 추천사를 실었습니다. 같은 책벌레끼리, 반가웠어요. ^^


나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는다. 활자 중독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내게,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이 무슨 소용인가. 책을 펼치면 언제든 황홀경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책벌레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나보다 더한 중증 환자가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을 것이다. 책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부질없이 보낸 시간에 문득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괜찮다. 아직 늦지 않았다. Dum spiro, spero. 숨 쉬는 한, 희망이 있다.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희망이. 만국의 책벌레들이여, 열광하라! 여기 가슴 벅찬 독서 예찬론이 펼쳐진다.

- 김민식 (MBC 드라마 PD,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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