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다시 만난 이상문학상

by 김민식pd 2018. 3. 30.

강다솜 디제이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 '잠 못 드는 밤'에 야매 상담가로 출연하고 있어요. 청취자분들의 고민 사연을 접하고 해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책을 뒤져보기도 합니다. 방송을 하며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화내는 법>이라는 책에서 읽은 구절입니다..."하고 말을 꺼내면, 강다솜 아나운서가 "맞아요. 그 책 참 좋죠?"하고 맞장구를 쳐줍니다. 너무 신기해요. 제가 소개하는 책을 강다솜 아나운서도 읽은 경우가 참 많더라고요. '나는 거의 직업적 독서가에 가까운 사람인데, 솜디도 만만치 않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날 강다솜 디제이가 방송 끝나고, "선배님은 이 책 읽으셨을 것 같지만, 혹시 안 보셨다면..."하고 빌려준 책이 있어요. 

<2018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 손홍규 외) 

올해 대상 수상작은 손홍규 작가님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네요. 책을 받고 펼쳐보니, 선정 경위와 심사평부터 나오더군요. 소설가 최은미씨가 쓴 작가론이 이어서 나오고요. 저는 심사평이나 역자후기를 먼저 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혹시 스포일러가 있을까봐. 센스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어떤 글귀 하나나 한 문장을 듣고, '혹시?' 하고 결말을 눈치채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가급적 스포일러는 사양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최은미씨가 본 선배 손홍규 작가 이야기에서 갑자기 훅 끌리더군요. 대학 시절 손홍규 작가는 전문연 의장도 맡고, 한총련 일도 하느라 바빴답니다. 연대 항쟁 이후 수배를 당하다 구속이 되었고 출소 후에는 군대에 갔다고요. 90년대 운동권이라... 저는 대학은 87학번이고 대학원은 95학번이에요. 운동권이 아니었기에 멀리서 보기만 했지요. 제가 느끼기에 80년대 운동권과 90년대 운동권은 다 힘들지만 어쩌면 90년대 운동권이 더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87항쟁을 통해 승리의 기쁨과 투쟁의 효용을 맛본 게 80년대 운동권이라면, 90년대 운동권은 그런 성공의 기억보다 좌절과 쇠퇴의 기억이 더 많은 세대거든요. 96학번인 최은미 작가는 선배 운동권인 손홍규 작가를 어떻게 추억할까요? 

'홍규 선배가 그 시기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통과해갔는지 얘기를 나누어본 적은 없다. 노수석의 죽음을 빼고, 한여름의 연세대를 빼고 96년을 돌아보긴 힘들다. 그 이후에 우리를 덮쳐 왔던 엄청난 좌절감에 대해서, 홍규 선배한테 또한 그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해서, 선배가 그때를 쓰려고 했고 써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선배의 소설을 통해 알 뿐이다.

'그는 어떻게 목격의 고통을 견뎠을까.''

(위의 책 33쪽)


그러게요. 작가는 어떻게 목격의 고통을 견뎠을까요? 제게는 80년대의 운동권이 우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많은 작가들이 그 시절 운동권 출신이지요. MBC 선배들 중에도 많이 계시고요. 90년대 방송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기도 하지요. 그들 중 몇몇은 이명박 정권 이후 MBC 장악의 '공범자들'이 됩니다. 그들의 변절을 지켜보는 게 참 괴로웠습니다.

대상 수상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정말 좋았어요. '아,이런 이야기로구나.'하고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갑자기 멍해지는 그런 소설. '이 작가의 책을 다 찾아서 읽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작품. 그가 어떻게 목격의 고통을 견뎠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 그에게는 구원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쓰기가 재능인지 아닌지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도 글이 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만. 

어린 시절 저는 매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찾아서 읽었어요. 이상문학상을 통해 나의 우상들을 만났어요. 은희경, 신경숙, 김훈, 한강, 김연수, 박민규. 김영하 등등. 책 뒤표지에 나온 수상자들의 이름을 읽다, 문득 서글픈 생각도 들었어요. 우상 중에는 추락한 우상도 있거든요. 괜찮아요. 낡은 우상을 새로운 우상으로 바꾸는 것도 살아있는 한, 계속해야 할 노력이니까요. 

경향신문을 구독하면서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칼럼을 즐겨 읽는데, 정작 소설가 본인의 작품은 이제야 접하네요. 저의 게으름을 반성합니다. 

이상문학상, 여전히 좋은 작가와 작품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군요. 눈 밝은 후배 덕분에 다시 시작합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 읽기.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자본론'을 읽는 이유  (18) 2018.04.04
어느 불량품의 행복한 고민  (5) 2018.04.02
책벌레를 위한 독서 예찬론  (8) 2018.03.29
책을 꼭 읽어야할까?  (22) 2018.03.23
공부는 혼자 하는 것  (26) 201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