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이어 다독하는 비결, 두번째. 대하소설에 맛 들여라.

예전에 난 독서주간에 시립도서관에서 주는 다독상을 받은 적이 있다. 도서관에서 1년간 200권을 빌려봤다기에, '진짜?' 그랬다. 그렇게 많이 빌려 본 줄은 몰랐다. 그래서 1년 간 본 책을 짚어봤다. 태백산맥, 장길산, 객주, 삼국지, 초한지, 영웅문... 음... 이렇게만 세어봐도 금세 100권이다. 가난한 대학생이 10권짜리 대하소설 살 돈이 어디있나, 다 도서관에서 빌려봤더니 1년 대여권수가 200권을 넘긴 것이다.

책 많이 읽는 비결? 대하소설에 맛을 들이면 된다. 연출 지망생을 위한 대하소설 추천목록 나간다.

1. 태백산맥
아직 못 봤다면 무조건 보시라. 요즘은 행사가로 나와 책 값도 싸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가보면 상태 좋은 중고도서도 많이 있다. 한국문학의 최고 정점이라 생각한다. 한강이나 아리랑은 사놓고도 몇번 읽다 말고 읽다 마는데, 태백산맥은 잡았다하면 무조건 끝까지 읽힌다. 참 잘 쓴 책이다. 

2. 장길산
황석영 선생은 구라빨로 유명하신 분인데, 최신작 '낯익은 세상'을 읽으며 아쉬웠다. 아, 이 분도 나이들며 구라빨이 약해지는구나... 새삼 장길산이 그립다. '무기의 그늘'도 재밌었지만, 그 시절 장길산은 정말 최고였다. 

3. 영웅문
무협소설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아직 안 봤다면, 한번 시도해보시라. 편견이 사라진다. 김용의 대하 소설은 우리 사극 드라마의 전형으로도 자주 쓰인다. 무공은 일천하지만 마음은 착한 청년이 여행을 떠났다가 웬 거지를 만난다. 그런데 그 거지는 알고보면 숨어사는 절세고수! 그에게 내공을 전수받아 순식간에 무림 고수로 태어난다. 그 과정에서 아이템도 얻고, 동지도 얻는다. 영웅문의 이야기 구조는 사극 연출을 지망하는 드라마 PD 지망생들이 꼭 한번 눈여겨 볼 만 하다. 사조영웅전 (전8권)만 봐도 김용 월드는 이해할 수 있다. 이 분의 전작 읽기에 도전하는 건 권하지 않는다. 그냥 맛만 보시라.

4. 도쿠가와 이에야스
어릴 적, 어머니가 '대망'이라는 이름의 소설을 보며, 늘 내게 '너도 크면 꼭 읽어봐.'라고 하셨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나니 '대망'이라는 책은 서점에 없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였던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란 원제를 되찾았다. 일본의 '삼국지'라 불리는 작품이니,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세명의 걸출한 영웅들이 일본 천하통일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이 시대 역사를 모르면, 일본 만화나 게임의 재미가 반감된다. 오다 노부나가는 애니 '전국 바사라'나 게임 '귀무자'에서 대마왕으로 나오는 악역 전문 역사속 캐릭터니까. ^^   

대하소설을 추천하자면 토지나 삼국지나, 더 들어가야 할 작품이 많지만, 나의 순전히 개인적인 추천목록은 여기까지다.

    (월급장이의 낙. 예전에 빌려 본 책, 다시 사서 모으는 것. 도서관에 진 빚, 서점에 갚는다.^^) 

연출 지망생을 위한, 오늘의 보너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내를 배우다.

여러가지 정신력 중, PD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전 정신, 투지, 끈기... 등등 여러가지 있겠으나, 내 생각에 연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력이다.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드라마PD의 삶은 늘 기다림의 연속이다. 작가가 쓰는 대본을 기다리고, 캐스팅 제의에 대한 배우의 답을 기다리고, 촬영에 들어가서는 무대가 지어지길 기다리고, 조명 세팅을 기다리고, 마이크 세팅을 기다리고, 배우의 스탠바이를 기다려야 한다. 연출이 재촉한다고 금방 되는 일은 없다. 작가는 대본에, 배우는 출연 결정에, 조명팀은 조명에, 미술팀은 세트에, 각자가 자신의 작업에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공을 들이기를 바란다.

연출 혼자 다가오는 방송 시간에 애닳아하다간 명대로 못 산다. 드라마 촬영이 허구헌날 밤을 새는 이유는, 올림픽 대로에 교통 체증이 생기는 이유와 똑같다. 모두가 일정한 속도로 달리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누구 하나 늦어지면, 뒤로 갈수록 소요 시간은 점점 더 오래 걸린다. 대본이 늦어지면, 배우가 대본 암기를 못해 연기 NG가 잦아지고, 그러면 스탭들이 피로가 쌓이고, 밤을 세게 되면서, 전반적인 촬영 효율이 극도로 저하된다. 이때, 냉정을 잃지 않고,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법. 독실한 신앙의 힘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한 방식은 특이하다. 그는 기다림으로써 세상을 손에 넣었다. 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는 싸움하다 세력을 잃고, 히데요시 역시 대륙에 눈독들였다가 망했다. 이에야스는? 그냥 묵묵히 자신의 힘을 키우며 때를 기다렸다. 

이게 진짜 실력이다. 기다릴 줄 알아야한다. 기다릴 줄 모르는 장수는, 섣불리 싸움에 나섰다가 군대를 잃고, 기다릴 줄 모르는 연출은, 섣불리 재촉했다가 스탭들의 신의를 잃는다. 기다려야 할 때는 말없이 기다리는 것, 그 기다림의 힘을 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배웠다. 

드라마 연출을 하지 않고 있는 요즘,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도보 여행으로 체력을 키우며 지낸다. 다음 기회까지 오랜 기다림, 그 역시, 연출의 일부다. 

PD 공채에 자기소개서를 내놓고, 작가 공모에 대본을 내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들 것이다. 그러나, 견뎌야한다. 기다려야 할 때, 잘 기다리는 것도 실력이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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