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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어느 꼴찌의 고백

by 김민식pd 2017. 6. 13.

지난 달, 공대 교수님들의 워크샵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교수님들은 강의가 직업입니다. 그런 분들 앞에서 감히 강의를 한다니 많이 떨렸어요. 하지만, 그곳에 달려간 이유가 있어요. 제 성적표를 교수님들에게 보여드리려고요.

 

 

1987학년도에 한양대학교 자원공학과에 입학했는데요. 학점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3학점짜리 응용수학 C+, 정역학 D+. 2학기 응용수학2는 C 0. 3학점짜리 전공 과목이 다 C 아니면 D입니다.

 

심지어 대학 2학년 1학기, 영어3 성적이 D+입니다. ^^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의 저자, 대학 영어 성적이 D학점이에요.

 

 

 

2학년 2학기 성적도 시들시들합니다. 응용수학, 지구물리, 광물실험, 모조리 C나 D로 깔았습니다.

 

방위병 복무하러 가서 작전을 새로 짜요. 전공은 아무래도 글러먹은 것 같으니 그냥 영어 공부나 열심히 하고 책이나 많이 읽어야겠다고.

 

 

 

복학 후, 전공 공부는 포기했습니다. 일반화학, 광상학, 광물처리공학, 3학점짜리 전공은 다 C나 D입니다. F가 나오면 교수님께 부탁해서 그냥 D로 달라고 합니다. 재수강한다고 성적이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대신 제가 관심이 있던 영어나 경영 관련 수업을 들었어요.

국제경영, 현대사회와 경영, 현대사회와 경제, 상업영어, 시사 영어는 다 A학점을 받습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전공을 억지로 공부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공부라면 최선을 다한다', 뭐 그런 자세였어요.

 

영어와 무역 관련 과목을 공부하여 종합상사에 취업하고 싶었어요. 그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나중에 깨달았어요. 삼성물산이니 효성물산에서는 무역학과 출신만 뽑더라고요. 공대를 나온 비전공자라고 서류 전형에서 다 탈락했어요.

 

 

공대 교수님들에게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말씀드렸어요.

 

"아마 지금도 선생님 학과 어딘가 저같은 학생이 있을 지 몰라요. 공대랑 적성이 안 맞는 사람. 부모의 강권에 억지로 학과를 지원한 사람. 그런 학생들이 머리가 나쁜 건 아닙니다. 공부에 재능이나 끈기가 없는 것도 아니예요. 단지 지금 학과 공부가 적성에 안 맞는 것 뿐이에요. 다른 길을 찾도록 응원해주세요. 학교 도서관에 책도 많고, 인터넷에는 자료가 널려있어요. 본인이 공부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어디서든 정보와 지식을 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낮은 학점에 너무 기죽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전공 공부는 무수한 선택지 중 하나일뿐이다. 이것 아니라도 세상에 길은 어디든 있다고요. 전공 열등생이라고 인생 열등생은 아니라고 꼭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이혜정 / 다산에듀)라는 책을 읽었어요. 교육 문제에 있어 큰 파장을 던진 물음이지요. 서울대에서는 누가 좋은 학점을 받을까요? 수업 시간에 교수님 말씀 그대로 받아적고, 교수님 생각을 비판적 사고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학생이 가장 높은 학점을 받는답니다.

 

'서울대생들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해 보았다. 전체 응답자 중 대다수가 자신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적 사고력이 수용적 사고력에 비해 낮다고 응답했다. 기대와 달리 서울대생들은 스스로를 수용적 학습자로 여기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이 응답한 학생들의 학점 분포다. 학점이 높을수록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적 사고력이 수용적 사고력보다 낮다고 응답한 학생들의 비율도 더 높았다.'

 

 

지난 수 십 년간 한국의 발전 모델은 '패스트 팔로워', 즉 1등의 전략을 가장 빠른 시간내에 베껴서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었어요. 선진국을 쫓아가는 후진국 입장에서는 비판적 사고보다 수용적 사고가 도움이 됩니다. '쟤들은 이걸 왜 이렇게 디자인했지?' 따지기보다 일단 똑같이 베낍니다. '빠른 2등' 전략은 이제 시효가 다 되어갑니다. 중국 등 신흥공업국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업계 1위가 되어 시장을 선도해야 할 입장입니다. 베끼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앞으로 관건이예요. 이런 시대에도 우리의 대학은 여전히 수용적 사고를 가진 학생에게 더 좋은 점수를 줍니다. '질문은 하지마. 그냥 교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과연 이게 앞으로 답일까요?

 

책을 읽으며 생각했어요. 지금 대학에서는 과거의 내가 그랬듯 괴로워할 친구들이 많겠군요. '왜 나는 학점이 잘 나오지 않을까?' '왜 나는 공부를 못하는 걸까?' 대한민국의 교육 제도는 너무 권위적이고 일방적입니다. 한 사람의 말을 수십명의 학생이 받아적기만 하는 시스템.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이나마 자신만의 사고를 하고, 비판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은 불리할 수 밖에 없어요. 학점이 낮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그런 사람이 창의적 사고를 가진 미래형 인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학점이 나쁘다고 인생이 망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거.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나 자신을 평가하지 말아요. 이번 학기 성적은 얼마일까? 이번달 나의 인사고과는 몇점일까?

중요한 건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준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기준은 3가지입니다.

 

'나에게는 좋아하는 일이 있는가?

그 일에 나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그 일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 있는가?'

 

3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 답을 찾는 것이 평생의 공부라고 생각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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