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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불편해도 괜찮아

by 김민식pd 2017. 6. 8.

드라마 감독으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 때는 따귀 맞는 장면을 찍을 때입니다. 리얼하게 세게 때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짜로 때리는 시늉만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어렵습니다. 어쩌다 NG가 나서 "다시 한번 더 할게요."라고 말할 때는 어디론가 숨고 싶어요. 김두식 선생님의 책을 읽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글을 만났습니다. 

 

불편해도 괜찮아 (김두식 지음 /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창비)

 

세상에는 따귀 말고도 사랑과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걸 익혀 나가는 게 바로 인생입니다. 그 많은 표현방식을 연구하고 익히는 대신 따귀 한 대로 모든 상황을 정리하는 우리 드라마 작가들과 PD들의 태도는 딱 한 단어, ‘게으름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기회를 준다면, 먼저 최근 10년간 한국 드라마에서 따귀 때리는 장면만 모두 모아서 보여준 뒤 그 문제점을 지적해보고 싶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초반 10분 동안은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따귀 장면만 계속 보여주겠습니다. , , , ....... 박수소리가 아니라 따귀소리만으로 가득 찬 화면을 10분쯤 보고 나면 아마 방송국 사람들도 마음을 고쳐먹게 되겠지요. 가끔 제 주변에는 저에게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마라. 살다보면 따귀 한 대쯤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긴다. 주먹을 부르는 여자들의 말은 폭력이 아닌 줄 아느냐?”고 말하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남자들과 따귀 때리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97)

 

 

굳이 부끄러운 변명을 하자면, 드라마는 생활 소음과 경쟁하는 콘텐츠입니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나 도서관에서 읽는 책은 집중이 가능한데요. 연속극의 경우, 시청 환경이 산만합니다. 밤 10시 미니시리즈만 해도 화면 집중이 가능해요. 아침 연속극이나 저녁 연속극은 주부들이 식사 준비나 설거지를 하면서 배경으로 틀어놓은 경우가 많아요. 이럴 때,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방법이 따귀에요. "철썩!"하는 소리가 나면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거든요. 오랜 세월 사바나 초원에서 맹수들에게 쫓기면 살아온 겁많은 원시인이 우리 마음 속에 있어요. 누군가 맞는 소리는 우리의 온 신경을 사로잡습니다. 여기까지가 비겁한 변명이고요, 앞으로는 더욱 고민하겠습니다. 이야기와 캐릭터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요. ^^)

 

김두식 교수님은 드라마와 영화 속 장면을 들어 인권을 이야기합니다.청소년 인권, 성소수자 인권, 여성과 폭력, 장애인 인권, 노동자의 차별과 단결, 종교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재미와 의미를 이렇게 잘 버무리기는 쉽지 않은데요, 많은 이들이 책을 읽고 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번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스러울 때 참고할만한 글이 있어요.


헷갈리는 상황에서 기억할 만한 원칙이 바로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형사소송법에서 자주 논의되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변용한 표현인데, 누구 입장에 서야 할지가 불투명할 때 방향을 정하는 좋은 기준이 될 있습니다.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주로 노동조합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은 대체로 이런 해석원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183)

 

어려서 따돌림을 당할 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다수의 즐거움을 위해 한 사람이 희생 당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놀림 받는 나의 아픔과, 놀리는 아이들의 즐거움은 등가 교환 가능한 가치일까? 재미와 고통은 같은 무게가 아니더라고요.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할까? 놀림을 주도하는 5명의 아이나, 묵묵히 방조하는 30명의 반 친구들이나, 어린 제게는 다 상처였어요. 침묵은 강자에게는 암묵적 지지이고, 약자에게는 소리없는 폭력이거든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한 친구는 미국에 있는 동안 일본에서 온 친구들을 데리고 한국식당을 찾았다가 난처한 경험을 당했습니다. 친구들이 조그만 가방을 어깨에 가로질러 멘 것을 보고 식당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잘 모르셔서 그렇겠지만 그런 작은 가방은 게이들만 들고 다니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오해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가방을 바꾸시는 게 좋겠어요.” 그날 식당을 찾은 일행은 모두 게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악의 없는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바로 그 친구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놓고 사는 것이 바로 인권의 황금률입니다.

(위의 책 88)

동서고금의 말씀이 있지요. '역지사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누구도 소수자의 입장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소수자가 됩니다. 사고나 질병을 통해 우리는 장애를 안게 되고, 유족이 되어요.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더 재미난 인권 이야기.

재미도 재미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참 의미있는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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