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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지금 이곳은, '대리 사회'

by 김민식pd 2016. 12. 8.

2016-238 대리 사회 (김민섭 / 와이즈베리)

어린 시절 꿈은 문학도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어요. 저는 피를 보는 것도 질색이고, 의사라는 직업도 싫고, 무엇보다 성적도 좋지가 않았어요. 아버지는 항상 말하셨지요. "니가 내 집에서 내 돈 받고 살려면, 내 말을 들어야지." 저는 그 말씀이 지긋지긋해서, 대학에 올라가자 독립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짠돌이가 되었지요.

아버지의 돈을 받으며 평생 아버지의 아바타로 사는 것보다, 가난해도 나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의 품안에서도 내 삶의 주체로 사는 것이 참 어려운데 돈을 버는 직장에서는 더 힘들겠지요? 문학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공대를 나와 영업사원을 거쳐 통역대학원에 가고, 서른에 예능 피디, 나이 마흔에 드라마 피디가 되면서 겨우 겨우 문학과 생계의 접점을 찾아가는 기분입니다.

 

지난 봄에 읽은 책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통해 엿본 우리 시대 문학 청년의 삶, 만만치가 않군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따고 출신학교인 지방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는 저자가 어느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행정조교로, 시간강사로, 연구원으로, 박사과정까지 대학에서 8년을 일했지만 아이를 위한 건강보험조차 들어주지 않아요. 은행 대출을 위해 필요한 재직 증명서 한 장, 대학에서는 떼주지 않습니다. 그는 제대로 된 노동자도 못되니까요. '4대보험 가입'이라는 채용 공고를 보고 맥도날드를 찾아가 그곳에서 육체 노동을 합니다. 맥도날드에서 매달 정해진 근로시간을 채워 아이를 위한 건강보험을 가입하고, 아버지로서의 보람을 느끼지요. '대학이 어떻게 맥도날드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의 질문은 지방대 시간 강사의 삶에 대한 르포로 이어지고, '309동 1201호'라는 필명으로 책을 냅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이런 사람이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본 대학 동료들이 만나자고 연락해옵니다. '니가 '지방시'지?' 그들은 그에게 사과를 요구합니다. 지도교수님을 뵙고 잘못을 빌라는 이야기에 그는 학교를 그만둡니다. 그가 대학 강사 일을 그만뒀다는 소식에, 교수의 꿈을 포기했다는 얘기에 울적했습니다. 조직이 내부 고발자에게 어떤 대접을 하는지 저도 조금은 알거든요.

페이스북을 통해 그가 대리 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가도 카카오 드라이버에 콜이 뜨면 달려나갑니다. 취객의 차를 몰면서 그는 행위의 통제(브레이크와 엑셀 말고는 차량 내부 조작을 못합니다. 운전석의 위치나 에어컨 조작도 못하고 오직 차의 상태에 몸을 맞춥니다.) 언어의 통제 (손님이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대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손님이 어떤 의견을 내든 수긍만 합니다.) 그리고 사유의 통제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할 수 않게 된다는 의미이지요.)를 겪으며 '대리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가 내린 결론.

 

'나는 이 사회를 대리사회로 규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서 현상을 바라보고 사유하지 않는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틀을 만들고, 스스로 사유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강요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믿으며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11쪽 프롤로그 중)

 

어려서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하던 사람이, 회사에 들어가서는 상사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미디어와 기득권 세력이 전파하는 우리 시대의 욕망을 자신의 것이라 믿으며 보수화되기 십상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찾아가기가 갈수록 힘든 시절이에요.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 예컨대 의사 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눈총이 쏟아진다.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그렇게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 된다. (...) 특히 국가는 순응하는 몸을 가진 국민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어떤 비합리와 비상식과 마주하더라도 그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국민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대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감시하고 격리해 나가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할 '대리국민'을 양산해 낸다. 그러한 국민/개인들은 국가/조직이 얼마든지 간편하게 통치/통제할 수 있다.'

(35쪽)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점... 재벌이고, 정치인이고, 전문가고,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마치 허수아비가 나와서 답변을 하는 것 같았어요. 저런 사람들이 기업을 이끌고 국가 기관을 이끈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습니다.

이 책은 시대 정신을 꿰뚫는 걸작입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 사회라고 하는데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우리 시대, 가장 주체적으로 산다고 믿었던 대통령, 그 누구의 명령을 따르거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는 대통령조차 타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 대리 인간이었으니까요.

탄핵 정국 막바지에, 95%의 국민이 하야를 요구하는 이 시점에도 대통령은 대리 인간입니다. 어제도 뉴스에서 대통령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너무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고, 아버지의 망령을 위해 일하고, 재벌의 욕망을 위해 일하고, 최순실의 욕구에 따라 일하는 것도 이제 좀 내려놓으시고 쉬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대통령께 감히 일독을 권합니다.

김민섭의 '대리 사회',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는 이제 그만두고 당신만의 시간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 인간으로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지는 길이 거기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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