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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내 안의 음란 마귀

by 김민식pd 2016. 10. 17.

2016-212 내 안의 음란마귀 (김봉석, 현태준 / 그책)

 

독서가 취미입니다. 책 읽는 습관은 국어 선생님인 어머니 덕에 길렀어요. 집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단편문학선이 있었거든요. 책을 읽게 된 강력한 동기부여가 있었어요. 바로 제 안의 '음란마귀' 말입니다.

 

중학생 시절, 소설에서 야한 장면을 찾아읽는게 재미있었어요. 한국 현대 소설 중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 많았거든요. 아슬아슬한 묘사를 읽으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요. 그 시절에 신문 연재 소설들은 또 왜 그리 야하던지! 인터넷도 없던 시절, 야한 소설을 읽으면서 성적 호기심을 채웠어요. 

야한 대목을 하도 자주 읽어서 책을 펼치면 바로 야한 장면이 딱 나와서 화들짝 놀랐던 적도 많아요. 고등학교 올라가서 야한 이야기의 보물창고를 발견합니다. 바로 무협지지요... 만화방에 틀어박혀 무협지를 즐겨읽었어요. 야한 만화의 경우, 누가 볼까 민망한데 활자로 가득한 책을 보고 있으면 뻔뻔해지거든요. 그때 알았어요. 그림보다 글자가 더 야하다는 것을. 그렇게 활자중독자가 되었지요.

 

책만 읽던 제가 영화광이 된 것도 음란마귀(?) 덕분입니다. 고3 때 학력고사를 마치고 딱히 놀러갈 곳이 없어 울산대학교 앞에 가서 놀았어요. 시내는 어른들의 놀이터고, 대학가는 왠지 어른과 청소년 사이의 중간지점 같았어요. 1987년 겨울, 울산의 대학가 카페에서는 야한 비디오를 틀어줬어요. 그때 '엠마뉴엘 부인' 시리즈와 일본의 로망 포르노를 처음 보았지요. 신세계가 열리더군요. 어두침침한 카페 구석 쇼파에 앉아 하루에 영화 3~4편씩 보았으니...

그 시절, 저는 영상의 세례를 받았어요. 그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로리타' '시계태엽 오렌지'같은 걸작을 보았습니다. 당시엔 그냥 야한 영화인줄 알았지, 명작인줄 몰랐어요. ^^

 

부모님이 부부교사다보니 금기시되는 게 많았어요. 만화도 안 되고, 오락실도 안 되고. 어른이 된다는 건 부모님이 쳐놓은 금기의 영역을 하나하나 깨는 작업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해보기 전에는 모르잖아요?

어린 시절, 책벌레이던 제가 춤에 빠지고, 영화에 빠지면서 날라리 딴따라가 되었지요. 그 덕에 저는 피디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그냥 책만 읽었다면, 내 속에 이렇게 다양한 재미를 향한 욕심이 숨어있다는 걸 몰랐을 거예요.

 

'김봉석 현태준 두 아재의 거시기하고 거시기한 썰'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 안의 음란마귀'를 읽으며 어린 시절 추억에 빠졌습니다. '아, 그 시절, 그렇게 성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건 나 뿐만이 아니구나... 내가 특별히 음란한 건 아니었구나...' ^^ 다른 사람의 일탈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네요.

 

 

요즘도 저는 극장에 야한 코미디 영화가 개봉하면 혼자 보러 갑니다. 사람들이 쳐다보지요. '중년의 변태가 혼자 야한 영화 보러 왔구나...' 저는 타인의 시선을 별로 신경쓰지 않아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게 우선이지요.

'내안의 음란마귀'를 읽으며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게 죄도 아니라고요. 치명적 사랑을 다룬 소설, '데미지'에 대해 김봉석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 사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사랑에 빠져든다고도 하고, 죽음의 순간을 대리 경험하기 위해 섹스에 탐닉한다고도 한다. 자신에게 절실하기만 하다면, 어떻게든 무엇에든 넘어가도 괜찮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고. 하고 나서 엄청나게, 죽고 싶을 만큼 후회할지라도 가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사랑도, 섹스도 피하는 것보다는 해보는 것이 낫다고 믿는다. 나이가 들면 망설이게 되니까. 그다음 어귀가 보이니까 굳이 가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니까. 그래서 소설 '데미지'를 40대 중반에 읽었을 때 더욱 공감했다. 그 남자가 왜 빠져드는지 이해가 됐다. 그걸 알고 싶다면, 직접 소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직접 경험하는 것 말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세상에는 있다. 어떤 작품들도 그렇다. '데미지'도 그렇다.'

(위의 책 108쪽) 

 

저는 문화평론가 김봉석 선생님의 책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재미난 것들을 추천해주십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을 꼭 찾아보세요. 제가 최근 몇 년 추리 소설 읽기의 재미에 푹 빠진 건, 다 김봉석 선생님 덕분입니다.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일단 해보고 볼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재미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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