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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

by 김민식pd 2014. 10. 2.

좋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은 보통의 경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란 참으로 어렵다.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귀한 경험이다.

 

박성제 기자가 쓴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이 책의 앞 부분은 술 먹고 골프 치고 놀기 좋아하는 한량 기자가 사람 좋아 덜컥 노조 위원장직을 맡았다가 '어쩌다 보니' 해직 기자가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다. 후반부는 해고자의 신분으로 울분을 달래기 위해 목공을 배우고 '그러다 보니' 하이엔드 수제 스피커를 만드는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는 얘기다. 책의 1부는 해직 기자, 2부는 스피커 장인이 주인공이다. 1인 2역. 

 

(이 글은 쿠르베 시리즈 3탄입니다. 이전 글을 읽지 않았다면 먼저 읽고 보셔도 좋아요~ ^^

 

2014/09/28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2014/09/30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나를 위로하지 마, 내가 위로할게

 

예전에 난 DVD 매니아라는 동호회 활동을 하며, 이글스의 'Hell Freeze Over'라는 콘서트 실황을 프로젝터로 보고, 미국에 가면 메탈리카 S&M 등의 실황 DVD를 사 올 정도로 음악광이었는데, 예능 피디에서 드라마 피디로 바꾼 이후, 음악보다는 문학에 심취해야겠다는 생각에 독서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음악 축제에서 쎄시봉 트리오 기타 콘서트도 연출한 바 있는 쇼 피디 출신이라능~ ^^)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오기에 가까울 정도로 돈 안 드는 취미에 집착해 왔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으로 독서 일기 쓰기, 출근길을 이용한 걷기 여행, 공짜 웹툰으로 연출 공부하기, 팟캐스트로 외국어 공부하기 등등. 

 

그런 나인데, 박성제 선배의 하이엔드 스피커 제작기를 읽고 나니, 갑자기 쿠르베의 소리가 듣고 싶어 미치겠는 거다. 그래서 책을 읽은 그날 가족과 함께 청음실을 찾았고, 천상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그 소리, 수백짜리 스피커가 수천만원짜리 소리를 들려준다는 바로 그 경험을 하자, 바로 지름신이 강림해버렸다. 기회가 되시면 여러분도 꼭 한번 그 소리를 들어보시길. 스마트폰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을 쿠르베 스피커로  듣는 경험은, 핸드폰으로 다운받아 보던 '아바타'를 아이맥스 극장에서 3D로 보는 것 같은 기적같은 감동을 줄 것이다.   

 

한동안 접었던 음악 감상의 취미를 다시 시작하게 한 글의 위력!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박성제 선배를 한달음에 찾아간 자리에서 물어봤다.

"선배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을 잘 쓰실 수 있나요?"

"글을 잘 쓰긴 뭘 잘 써. 그냥 후배들 기사 데스크 봐줄 때 처럼 하는 거지."

"어떻게 하는 건데요?"

"TV 뉴스는 무조건 쉽게 말해야 돼. 어렵게 말하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거든. 쉽게 말하는 게 더 어려워.  TV 뉴스는 70 먹은 할머니도, 일곱살 난 애도 알아듣게 해야거든? 그러려면 리포트가 쉬워야지. 폼 잡고 쓴 기사에서 어렵게 쓴 말을 쉬운 말로 바꿔주는게 뉴스 데스킹이야. 글도 그래서 쉽게 쓰려고 해."

 

와우! 바로 이거다. 글 잘 쓰는 비결.

쉽게 쓰는 거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면 이게 참 어렵다. 글을 쓸 때는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써야 한다. 글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려고 들 때다. 더 고상하게 표현하고 싶고 더 어려운 문자를 쓰려다보면 꼬인다. '내 생각은 말이야', 하고 시작하기보다 '예전에 내가 겪은 일인데', 하고 시작하는 게 답이다.

 

박성제 선배는 해직 조합원을 위로하는 노조 걷기 행사에서 갑자기 마이크를 건네 받았다. 해고된 지 1년 된 소회를 말해보란다. 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후배들 앞에서 뭐라 말해야 하는가? 언론의 자유와 부당한 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우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남들 다 아는 얘기 재탕이 되고, 괜히 유식한 말을 동원해야 할듯 하여 말이 어려워진다. 그럴 때는 자신이 겪은 일로 말을 꺼내면 된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언급한 글을 다시 살펴보자. 이번에는 박성제 기자가 글을 쓰는 방식, 자신이 겪은 일을 표현하는 방식을 음미하며 읽어보시라. 그는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지하철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묘사할 뿐이다. 쉬운 말로, 그러나 자세하게.

 

'스피커 부품 몇 가지를 구입하기 위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시내 나들이에 나선 길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큼직한 가방을 든 남자가 올라탔다. 쭈뼛거리면서 잠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윽고 가방을 열고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들었다. 울긋불긋한 무늬가 찍힌 싸구려 앞치마였다. 그는 조심스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께 오늘 특별한 상품 하나를 소개해드리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앞치마는 작년에 특허를 받은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입니다. 지금 가정에서 부인들이 쓰는 앞치마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사용하면 물에 젖고 기름이 묻어서 금방 더러워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앞치마는 특수 소재로 만들어 물에 젖지도 않고 기름이 묻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촉감이 부드러워서......."

신기술로 만든 거라 한 장에 만 원을 받아야 하지만 오늘만 특별히 5천 원에 판다고 했다. 외워 온 멘트를 또박또박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웬지 흥미가 일었다. 저 사람은 분명 초보다. 말을 더듬지는 않지만 경험 많은 잡상인 특유의 운율이랄까. 멘트에 노련한 맛이 전혀 없었다. 40대 중후반쯤 됐을까? 나이는 내 또래로 보였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말쑥한 회색 양복에 잘 닦인 구두, 깔끔하게 가르마 타서 벗어 넘긴 머리. 지하철에서 5천 원짜리 앞치마를 파는 잡상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가 나의 심증을 굳혀주었다. 지난주까지 어엿한 큰 회사에 다니던 부장님이었을지도 몰라. 회사가 망했을까. 아니면 정리 해고를 당한 걸까. 낮에는 저렇게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다가 저녁이 되면 대리운전을 뛰겠지. 새삼 동병상련의 심정이 생겨나서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들고 그 남자에게 외쳤다. 

"아저씨, 저 두 장만 주세요."

반가운 얼굴로 내게 달려와서 앞치마를 건네며 두 번이나 고맙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 들고 돌아서던 남자가 다시 내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저 혹시 MBC 기자분 아니신가요?"

급작스러운 질문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혔다.

"네?,,,,,, 마, 맞는데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생각한 남자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가 다시 굳어졌다.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김재철 사장에게 해고당한 기자 맞죠? 용기 잃지 말고 힘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나는 충격에 빠져 어안이 벙벙해졌다. 용기 잃지 말고 힘내라니. 저 양반이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 텐데. 나는 그래도 노조에서 생활비도 받고 나름대로 사업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을 잃고 처자식 생각에 지하철 행상에 뛰어든 이가 나를 위로하고 응원한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힘주어 잡아준 내 손에 온기로 남았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보니' 중에서-

 

글을 쉽고 잘 쓰는 비결은, 자신이 겪은 일을 묘사하는 것이다. 피디 입사 지원서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쓰지 말고 (창의력과 리더쉽이 뛰어나고, 타인과 협업하는 것을 즐기며,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자신이 한 일을 써야 한다. (어떤 노래를, 누가 개사해서, 어디서 촬영한 비디오를, 언제 유튜브에 올려, 어떤 반응을 얻었는지.)

 

피디 지망생이나 예비 방송 기자라면, 박성제 선배의 책은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다년간 MBC 뉴스의 팀장으로 활약하며 후배들의 기사 원고를 다듬은 사람이 보여주는 '좋은 글'의 전형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언론고시 준비하면서 많이들 좌절하고 상처 입을 것이다. 그런 이라면,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를 읽으며 고난과 시련에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글 잘 쓰는 요령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비법이다. 

'20년째 다니던 직장에서 졸지에 쫓겨난 중년 아저씨의 우여곡절 인생 2막 개척기'

이 책을 읽고, 그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니, 독서를 통해 꼭 무엇을 얻고, 인생을 바꾸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는 그 시간이 참 즐거울 것이라는 것은 내가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용감무쌍한 모험담이 또 없으니까.

 

결과가 바뀌지 않아도 좋다.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쿠르베,

해직 기자가 만든 스피커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가 되는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조만간 쿠르베 스피커 장만기를 올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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