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제 선배가 쓴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는 참으로 잘 쓴 책이다. 정말 좋은 글을 읽으면 나는 그 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다. 그래서 책을 끝내자마자 블로그에 들어와 독서 일기를 남겼다. 그러고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게 멈추지 않아 거실을 혼자 서성이다가 안방에 가서 자는 아내를 깨웠다.
"부인, 어제 얘기한 그 책 있잖아. 지금 다 읽었거든. 몰입도 완전 죽여. 그래서 얘기인데, 나 지금 그 선배 좀 만나고 와야겠어."
그래서 일요일 오전 7시에 차를 끌고 박성제 선배를 찾아갔다. 등산로 초입에서 만난 선배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와락 껴안았다.
"형, 책 잘 봤어요. 난 선배가 해직기자로 산 지난 3년의 세월에 대해 책을 낸다기에 울분에 가득찬 그런 책인줄 알았거든? 그런데 정말 유쾌하게 쓰셨더라구요. 보면서 형의 상황에 대해 마음이 막 아픈데, 그런데 형이 사는 모습은 너무 또 멋있는 거야. 아, 정말 이런 책 완전 처음이야."
50 다된 중년 남자의 호들갑이 유난하게 느껴질 것 같아 책에서 한 대목을 소개할까 한다. MBC에서 해고 된 후, 목공을 배우며 대패질과 사포질로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삭이던 박성제 선배는 죽이는 디자인의 수제 스피커를 만들게 된다. 어라, 주위 반응이 괜찮네? 이걸 만들어 팔아볼까? 라는 생각에 해직기자이던 그가 영세 사업자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시절, 그가 지하철에서 만난 어떤 사람 이야기.
'스피커 부품 몇 가지를 구입하기 위해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시내 나들이에 나선 길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큼직한 가방을 든 남자가 올라탔다. 쭈뼛거리면서 잠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윽고 가방을 열고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들었다. 울긋불긋한 무늬가 찍힌 싸구려 앞치마였다. 그는 조심스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께 오늘 특별한 상품 하나를 소개해드리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앞치마는 작년에 특허를 받은 신기술이 적용된 제품입니다. 지금 가정에서 부인들이 쓰는 앞치마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사용하면 물에 젖고 기름이 묻어서 금방 더러워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앞치마는 특수 소재로 만들어 물에 젖지도 않고 기름이 묻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촉감이 부드러워서......."
신기술로 만든 거라 한 장에 만 원을 받아야 하지만 오늘만 특별히 5천 원에 판다고 했다. 외워 온 멘트를 또박또박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웬지 흥미가 일었다. 저 사람은 분명 초보다. 말을 더듬지는 않지만 경험 많은 잡상인 특유의 운율이랄까. 멘트에 노련한 맛이 전혀 없었다. 40대 중후반쯤 됐을까? 나이는 내 또래로 보였다. 넥타이는 매지 않았지만 말쑥한 회색 양복에 잘 닦인 구두, 깔끔하게 가르마 타서 벗어 넘긴 머리. 지하철에서 5천 원짜리 앞치마를 파는 잡상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가 나의 심증을 굳혀주었다. 지난주까지 어엿한 큰 회사에 다니던 부장님이었을지도 몰라. 회사가 망했을까. 아니면 정리 해고를 당한 걸까. 낮에는 저렇게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다가 저녁이 되면 대리운전을 뛰겠지. 새삼 동병상련의 심정이 생겨나서 도와주고 싶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들고 그 남자에게 외쳤다.
"아저씨, 저 두 장만 주세요."
반가운 얼굴로 내게 달려와서 앞치마를 건네며 두 번이나 고맙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만 원짜리 지폐를 받아 들고 돌아서던 남자가 다시 내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저 혹시 MBC 기자분 아니신가요?"
급작스러운 질문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혔다.
"네?,,,,,, 마, 맞는데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고 생각한 남자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가 다시 굳어졌다.
"인터넷에서 봤습니다. 김재철 사장에게 해고당한 기자 맞죠? 용기 잃지 말고 힘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다음 칸으로 사라졌다.
나는 충격에 빠져 어안이 벙벙해졌다. 용기 잃지 말고 힘내라니. 저 양반이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 텐데. 나는 그래도 노조에서 생활비도 받고 나름대로 사업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직장을 잃고 처자식 생각에 지하철 행상에 뛰어든 이가 나를 위로하고 응원한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힘주어 잡아준 내 손에 온기로 남았다.
며칠 뒤 주말, 나는 다른 해고자들과 함께 남산에서 열린 노조 행사에 참여했다. 노조가 해고된 조합원들을 위로하고 조합의 단합을 도모하기 위한 행사였다. 백여 명이나 되는 후배들이 모여 해고자들과 함께 남산을 걸어 올랐다. 팔각정 앞에서 진행자가 해고자들에게 한마디씩 하라면서 마이크를 넘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며칠 전 지하철에서 만났던 이가 떠올랐다. 후배들에게 그가 내게 던지고 간 말을 들려준 뒤 이렇게 얘기했다.
"오늘 이 자리는 여러분이 해고된 저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기자가 아니라 시청자가 됐거든요. 형편없는 MBC 뉴스 보면서 혀만 끌끌 차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MBC 안에서 망가져가는 조직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권력에 굴종하는 더러운 세력과 싸우다, 그러다 징계까지 받으면서 버텨내야 합니다. 후배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만난 그분이 제게 했던 말, 그대로 제가 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저를 위로하지 마세요. 제가 위로하겠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늘 응원하겠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한 후배가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박 선배, 아까 연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눈물 날 뻔했다니까요. 힘낼게요."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중에서-
(모델 협찬 : 김민서 어린이. 모델료는 아이스크림 하나로 갈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나는 가슴이 막 뜨거워져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거실을 혼자 빙빙 돌기도 하고, 괜히 자는 아내를 깨워 말을 걸기도 한다. 그러다 도무지 참지를 못하고 등산 간다는 박성제 선배를 그 새벽에 찾아간거다.
선배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선배님, 그렇게 글 잘 쓰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피디 지망생이나 기자를 꿈꾸는 모든 예비 언론인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바로 그 답! 전직 MBC 기자가 공개하는 글 잘 쓰는 비결! 은... 시간 관계상 다음에 계속됩니다.
제가요, 이 책을 읽고 하도 필이 꽂혀서 한 며칠 시리즈로 포스팅을 올리려구요. ^^
그럼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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