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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어쩌다 보니, 그러다 보니'

by 김민식pd 2014. 9. 28.

읽어야 할 책이 서가에 쌓여 있다. 읽지 않은 책은 절대 책꽂이에 바로 꽂지 않는다. 이미 읽은 책 사이에 섞여 버리면 잊혀지기 쉽다. 그래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은 따로 눕혀서 보관한다. 책을 읽어야 책이 바로 세워진다. 읽을 책이 너무 많아, 몇달 째 서가에 누워있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책장에 읽지 않은 책이 쌓여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읽을 책이 다 떨어져 빈손에 나가는 날은 하루 종일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책벌레로 산다는 것은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며, 아직 읽을 책이 남았다는 쾌감 사이에서 오가는 연애의 밀당 같은 것이다.  

 

요즘 내 취미는 저자의 친필 싸인이 담긴 책을 모으는 것이다. 몇년째 연출작 없이 한가롭게 사는 피디가 누리는 호사는 저자 강연회에 달려가 줄서서 싸인을 받는 것이다. 그동안 버린 책이 수천권이다. 책장이 차면 비우고 차면 비우는데, 그때마다 버려지는 책이 아까웠다. 안 버리고 모으는 책은 무언가 봤더니, 저자 친필 싸인이 있는 책은 안 버리더라. 그래서 저자 싸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저자 친필 싸인을 모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인의 책을 사는 것이다. 다음에 만나서 싸인을 부탁하면 되니까. ^^ MBC 선배이자 해직언론인인 박성제 선배가 책을 냈다는 소식에 주문을 했다. 그렇게 주문한 책을 택배로 받은 게 어제 오후다. 책 뒷장을 보니 초판 1쇄 펴낸 날이 9월 26일인데 책을 받은게 27일 오후다. 

 

그리고 지금 9월 28일 오전 6시 30분... 나는 지금 책을 다 읽은 소감을 쓰고 있다... 벌써?

 

어제 저녁에 잠깐 책을 펼쳤다. 무섭게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더라. 원래 박성제 선배가 생각했던 책의 제목은 '누가 나를 MBC에서 잘랐나?' 였다던데, 그 제목도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를 죽였나?' 같은 미스터리 추리 소설처럼 정말 박진감있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다 늦둥이 둘째 재우느라 밤 10시가 넘어 같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새벽 4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된 거지?' 책벌레 인생에 이렇게 몰입감 높은 책은 또 간만일세. 

 

골프 잘 치고 술 잘 먹던 '한량 기자'가 어느날 덜컥 파업의 배후로 몰려 해고되었다. 어쩌다 보니 해직 기자, 그러다 보니 울분을 달래려고 취미로 목공을 시작했다. 식탁을 짜고, 와인 장을 만들고, 어라 해보니 재미있네? 평생을 오디오 마니아로 살았던 그는 자작 스피커에 도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제 받은 책을, 오늘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다 읽었다!

정말 재미있다. 하드보일드 소설에 나오는 그 어떤 히어로 탐정보다 더 쿨하고 섹시하다! 이보다 멋진 모험담이 또 어디 있으랴! 김어준 총수에 따르면, 중년 아저씨가 섹시한 건 용감할 때 뿐이라는데, 그 점에서 정말 용감하다 이 아저씨.  

 

아이들이 크면서 내가 접은 취미가 하나 있다. 예전에는 예능 피디 답게 프로젝터에, 스피커에, 앰프에, 온갖 게임기까지 연결해서, 거실을 홈 시어터로 꾸미고 살았는데, 애들 보는데 아빠가 대화면으로 비디오 게임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게임기를 버리고, TV 대신 그 자리에 커다란 책장을 짜넣었다. 집에서는 늘 책만 본다. 그러다보니 음악이나 영화 감상을 못하고 사는데... 책을 읽고 나니 갑자기 쿠르베 스피커가 사고 싶어졌다. 

 

오늘 당장 마님을 모시고 청음실로 달려가야겠다. 

 

인생, 뭐 있나?

아름다운 스피커로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웃으며 살고 싶다.

가장 부조리한 대우를 받은 중년의 남자가,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는 대신, 목공에 취미를 들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피커를 만들어 냈는데 말이다.

 

세상이 험할 땐,

버티는 게 최선이다.

기왕 버티는 거, 즐겁게 버티자.

 

재미난 책을 읽으며, 

아름다운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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