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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

요트로 세계일주하는 법

by 김민식pd 2014. 6. 17.

일산 MBC 드림센터에서 상암 신사옥으로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다 오래 전 잡지 한 권을 찾았어요. 별 생각없이 뒤적이는데 어떤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지요. 요트로 세계일주한 한 남자의 이야기,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멋진 모험담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어 블로그에 옮겨봅니다. '1/n'이란 잡지, 다시 보니 정말 아깝네요, 이 좋은 잡지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게...

1/n 2010년 여름호, '인생의 전환을 결심한 11명의 환승티켓은 무엇인가'

라는 특집으로 직업이나 전공을 바꾸어 인생의 전환점을 찾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중 유병만 님의 인터뷰를 옮깁니다.

 

유병만 

대학 시절 부상으로 운동을 접은 이후, 요트를 직접 만들어 세계 일주를 해보자는 꿈을 키웠다. 호주, 뉴질랜드를 거쳐 영국에서 요트마스터 자격증을 취득하고 선원으로, 또 선장으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했다. 귀국 후 요트 리조트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Q: 요트 사업을 하신다고요? 요트를 직접 타세요? 아니면 거래하는 건가요?

A: 만들기도 했고, 타기도 했고, 팔기도 했죠. 지금은 요트 리조트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요트 리조트를 만드는 것이 지금의 꿈이죠. 그전까지는 '스키퍼 (요트의 선장)'로 일했어요.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했죠.

 

Q: 정말요? 저도 세계 횡단이 꿈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요트를 접하셨나 봐요?

A: 전혀 아녜요. 전 체육교육을 전공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잘했고 무술도 좋아했고, 인간의 움직임에 대해 늘 매력을 느꼈어요. 스포츠의 핵심은 움직임 안의 리듬을 포착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체험이 늘 신비로웠죠. 원래는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철학과 교수였던 친구 아버지 왈, "너희들이 생각하는 건 철학과에 가면 안 배운다. 철학과에서는 기존 탐구를 답습하는 걸 배운다"라고 하셨어요. 진학을 앞두고 고민을 했죠. 그러다가 인간의 존재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동물' 즉 움직이는 물체라는 결론을 내리고 운동을 하기로, 체육을 전공하기도 결심했어요. 부모님 반대가 심했죠.

 

Q: 왜요?

A: 그때가 고교 1학년쯤이었는데 부모님께서 충격을 받았어요. 제가 전교 회장도 했고, 공부도 제법 하는 편이라 기대가 크셨던 거죠. 그렇게 2년을 싸웠는데, 지금 봐도 잘한 선택이었어요. 후회는 없어요.

 

Q: 대학시절은요?

A: 막상 대학을 갔는데, 국내 체육학계의 현실이 제 궁금증을 전혀 못 풀어주었어요. 잔뜩 기대한 '체육 철학' 수업도 실망스러웠고, 이런 고민을 공유할 친구도 없었어요. 물론 제가 빨리 질리는 성격이기도 해요. 무언가의 원리를 한번 알고 나면 흥미를 잃는 식이죠. 하지만 깊이를 얼마나 줄 수 있느냐에 따라 달랐어요. 깊이를 줄 수 있는 것을 찾고 싶었던 거죠. 그러던 와중에 미식축구를 하다가 심하게 다친 거예요. 어깨 수술을 받고, 양쪽 아킬레스건을 모두 다쳤어요. 대학병원에서는 다시는 못 뛸 거라 했죠. 그 말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운동하다가 다친데 또 다치고, 술 마시고....... 방황기였죠.

 

Q:  그 시기를 어떻게 보냈나요?

A: 군대 간 친구가 휴가 나와서 술 한 잔 하다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어요. 전 중고등학교 때까지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아서 바다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죠. 비도 내리고 파도도 심한 날 차를 몰고 인천에 갔어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친 바다를 봤어요. 그리고 반해버린 거죠.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Q: 그게 요트로는 어떻게 이어졌죠?

A: 막연히 바다가 좋고 항해를 하고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보는데, 엔진으로 가는 '보트'는 싫고, 바람으로 가는 요트가 매력 있더라고요. 리듬이 매력적인 '세일링 요트'. 그해 겨울, 친구가 두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 제가 요트 책을 보여주면서 "이거하고 싶다"고 했죠. 나중에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때 하고 싶다더니 진짜 하는구나."

 

Q: 그 친구, 지금도 만나나요?

A: 그럼요. 골프하다가 지금은 보험으로 돌아섰죠.

 

Q: 정확히 요트에 관해 뭘 배우고 싶었던 거죠?

A: 어떻게 배우는지를 배우고 싶었어요. 처음엔 다 막연하잖아요. 요트에 관한 전 단계를 경험하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정보도 없고, 한국에서는 뭘 할 여건도 안 되어 있었어요. 해외로 메일을 보내도 답신이 안 왔고요. 그때 국내에서 유일하게 '쌍동선'을 만드는 분이 계셨어요. 그분을 찾아가 배 만드는 일을 같이 했죠. 호주에서 디자인한 배였는데 기술이전 때문에 브랫이라는 호주 사람이 왔고, 그와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어요. 한번은 맥주를 마시다가 문득 넌 뭘 하고 싶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Cruise around the world(세계를 항해하고 싶다)"고 대답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브랫도 요트 타고 세계 일주하는 게 꿈이었던 거죠.

 

Q: 그래서 힘을 합친 건가요?

A: 세일링 요트는 1년 동안 배 값이 안 떨어지기 때문에 그걸 타고 1년 동안 세계 일주를 갔다 와도 그대로 팔 수 있어요. 브랫에게 "너에게 기술이 있으니 돈은 내가 빌리겠다. 같이 배 만들어서 세계 일주를 해보자"고 했죠. 원래 목표인 2억5천만원의 반도 못 구했지만 무작정 호주로 날아갔어요. 거기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죠. 배 만드는 막바지 4~5주에는 돈이 없어 집을 빼고 공장에서 먹고 잤어요. 우여곡절 끝에 완성했는데,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목돈이 수중에 들어와서인지, 브랫의 마음이 바뀌어 세계 일주고 뭐고 배 팔고 쉬고 싶다는 거예요. 배신감이 들었죠. 결국 배를 팔고 돈을 나눠서 혼자 뉴질랜드로 갔어요.

 

Q: 왜 뉴질랜드였죠?

A: 뉴질랜드에서는 나무로 제작하는 기술을 배울 수 있었어요. 요트 사업은 제일 밑에 빌더(제작자)부터 시작해서 스키퍼, 디자이너, 소유주가 있는데 이 모든 단계를 섭렵하기 위해 빌더부터 제대로 공부하자고 마음먹었죠. 유리 섬유로 만드는 일반적인 요트 말고, 나무로 제작하는 '클래식 요트'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얼마 다니다보니 교육청에 등록이 안 된 곳이었어요. 또다시 좌절했어요. '그럼 중고 요트라도 사서 세계 일주는 아니더라도 대양 하나라도 건너자. 작은 요트를 사서 미국으로 간 다음 거기서 배를 팔면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요트로 유명한 분을 찾아가 상의를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제 얘기를 듣더니, "뭐? 넌 잘못된 곳에 왔어!" 라고 하시는 거예요. 편서풍 때문에 거꾸로 가야 했어요. 뉴질랜드에서 미국은 바람을 거슬러가는 방향이었던 거죠. 다시 한 번 고배를 마셔야 했어요. 그렇게 3년이 지나갔죠. 그러던 어느 날 세일링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모은 책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서문에 장애인올림픽 사무국장의 시가 눈에 띄더라고요. 

"하늘이여, 승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승리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도전의 한가운데에 설 수 있는 용기라도 주십시오."

 

Q:  멋진 시네요.

A: 세계일주가 왜 힘든 줄 아세요? 내가 바다와 자연 속에 묻혀 사는 동안 세상은 발전할 거고 나는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에요. 배를 팔고 처음으로 수중에 많은 돈을 가졌는데, 돈을 다 잃고 여자 친구를 잃어도 대양을 건너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다 잃어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지브롤터 해변에 있는, 영국 요트마스터 자격증을 주는 학원으로 날아갔어요. 자격증이 있으면 상업적인 용도의 요트에서 선원으로 일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호주에서의 경험이 있어서 합격했어요. 선원으로 취직해보려고 하는데, 한국 사람이고 나이가 어린 것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어요. 때마침 영국과 프랑스 해변 사이에서 '요트 딜리버리(운반)'라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요트를 화물선에 싣고 가는 것 보다 선장을 고용해 직접 항해하면 비용이 절감되죠. 돈 안 받아도 좋으니 무조건 시켜달라고 덤벼서 처음으로 1등 항해사 자격으로 배에 탑승하게 됐어요. 그래봤자 4명뿐이었지만.

 

Q: 그렇게 해서 대서양을 건넜군요.

A: 지브롤타 - 캐리비안 해 - 파나마 - 호주, 콜럼버스가 건넌 코스 그대로 갔어요. 우리가 무풍지대에서는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엔진을 써서 19일 걸렸는데, 콜럼버스는 21일 걸렸죠. 그는 천재적인 항해 기술자라고 생각합니다. 엔진을 안 쓰고도 그렇게 빨리 가다니! 그렇게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넌 거죠.

 

 

Q: 그런데 왜 굳이 횡단을 고집하셨죠?

A: 그것을 하면서 나오는 리듬이 궁금했어요. 하지만 대서양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죠. 내 마음은 이미 태평양에 가 있는데, 배에 문제가 있어서 두 달 동안 파나마에 묶여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답답해서 술을 마시다가 요트 딜리버리 경력 9년차인 프랑스 남녀랑 친해졌는데, "무조건 서쪽으로 가야한다. 요트 마스터라고 하고 서쪽으로 가는 배를 찾아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큰 배를 가진 노인 한 분을 만났어요. 그분의 친구이자 배의 주인이 FBI를 곧 은퇴할 예정인데, 배를 타고 미국에서 뉴질랜드로 가려다가 도중에 건강이 악화되어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태평양 건너 배를 딜리버리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안된다고 하다가 내가 하도 조르니까 "그럼 배주인에게 직접 얘기해보라"고 했죠. 정성껏 편지를 써서 그분에게 보냈는데 돌아온 대답을 잊을 수 없네요. "나이든 사람은 젊은이에게 기회를 줘야한다." 그리고 "너의 도전 정신이 대단하니 안전하게 도착하면 너에게 추천서도 써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결국 태풍 뚫고 태평양을 건넜고, 정말로 추천서도 받았어요. 미국은 추천서의 힘이 커서 쉽게 써주지는 않는데 말이죠.

 

Q: 그 후에는요?

A: 태평양 건너고 꿈을 이루니 할 일이 없더라고요. 미친 듯이 배만 탄 겁니다. 그해에 육지에 있었던 시간이 2~3개월도 안 됐어요. 꿈은, 이루는 과정 자체가 이루고 난 후보다 더 의미있는 거예요. 플로리다에서 다시 일자리를 찾았는데, 케냐에서 100피트짜리 큰 배를 모는 일이었죠. 그때 전 케냐가 남미에 있는 줄 알았어요.

 

Q: 케냐가 남미에 있다고 생각하셨다니....... 항해를 한다는 분이 기본적인 세계 지리도 모를 수 있나요?

A; 세상에는 두 부류의 여행자가 있죠. 문명권을 여행하는 사람과 자연을 여행하는 사람. 후자는 국경이나 국가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가령 이탈리아에 도착해도 도시로 들어가지 않았어요. 멀리 항구에서 '아, 이탈리아의 산세는 리듬이 대략 이렇구나'를 보면 그걸로 된 거죠.

 

Q: 그래서요? 케냐에서는요?

A: 케냐에 도착했더니 배가 무지 크더라고요. 겁은 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도 똘기로 도전한 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케냐에서 유럽 VIP 손님을 상대로 배로 관광시켜주는 일을 했어요. 몇년을 그렇게 일하다 보니까 차츰 여행에도 지치고 정착을 하고싶어졌죠. 

 

Q: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건가요? 정착하기 위해?

A: 고생을 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응어리진 게 있었어요. 나와서 요트를 배워보니까 기술 수준이 별 거 아니었어요.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저처럼 꿈을 가진 분들이 상처를 많이 입곤 해요. 그걸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을 구할 때 지원서 100개를 내봐야 3개 정도 연락이 오는데, 그중에서도 국적이 한국이라 거절된 적이 많았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꿈이 생겼어요. 내 다음 세대의 요트하려는 친구들이 이런 걸 겪지 않게 하자는 꿈이랄까? 요즘도 이메일로 문의가 많이 오는데, 그 심정이 느껴져요. 알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면, "하나도 몰라요. 꿈밖에 없어요"라고 하죠. 

 

Q: 전환을 결심하실 때 기준이 있나요?

A: 즐거움이 바탕이 됐을 때 할 수 있는 것, 힘든 건 당연한 거예요. 멋진 몸을 갖고 싶으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잖아요? 물리적으로는 힘들지만 그건 즐거움이죠. 힘들고 안 힘들고가 아니라 즐길 수 있냐 없냐 즉 감내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Q: 즐겁지 않은 순간은요?

A: 거의 없었어요. 진짜 힘들 때는 울어요. 호주에서도 많이 울었어요. 돈 가지고 친구와 싸우고 영주권도 없고....... 참 많이 울었는데 울면서도 즐거웠어요. 도전을 해서 사람이 성취한다고 생각하지만 도전 자체가 성취한 거라고 생각해요. 태평양을 건널 때 태풍을 만난 적이 있어요. 태풍을 만나면 바람과 배의 저항이 제로가 되는 상태를 만들고,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해요. 보통 24시간 안에 잠잠해지는데, 그때는 72시간이나 묶여 있었어요. 가장 위험한 상황은 돛이 부러지는 거죠. 돛이 배를 끌고 물로 들어가니까요. 문제가 생기면 돛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갑판으로 갔는데 막상 돛을 자를 위치를 보니까, 기계장치가 붙어 있어서 자를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거예요. 태풍이 불면 파도는 안 무서운데 바람 소리가 귀신 소리 같아요.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제정신이 아니었죠. 저걸 못 자르면 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순간 두려움이 밀려오고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어요. 스스로 물어봤죠. 선장인 네가 패닉하면 안 돼. 너 여기서 죽으면 뭐가 후회 되냐? 그런데....... 후회될 게 없었어요. 나는 대서양도 건넜고, 태평양도 거의 다 왔고, 후회가 없구나. 그러니까 안정이 되더라고요. 도전 자체가 성취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도전하는 순간 얻게 되는 거죠.

 

Q: 주위에 힘이 되신 분은요?

A: 가장 큰 힘은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의 영혼이 어떤지가 중요하죠. 나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좋아하는 인물은 헨리 데이빗 소로예요. '자신이 인생을 스스로 실험해라. 연장자에게 길을 묻는 것은 멍청하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죠.

 

Q: 최종 목적지 종착역을 상상하세요?

A: 죽음 이전에는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순 없죠. 모두 쉼표죠. 최종 종착역은 저예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수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항상 가고 싶었던 곳이 절이었죠. 그런 얘기 있죠? 제일 급 낮은 사람이 산에서 도를 닦고, 그 다음 사람은 저잣거리에서, 최고는 왕이 되어서 도를 닦는다고. 그래서 바다에 나간 거고, 돌아온 거죠.

 

Q: 지금 공항의 여객 터미널이라면 당신은 어디쯤에 있을까요? 

A: 매일매일이 출발이고 도착인 것 같아요.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봐요. 현실은 마라톤 코스와 너무도 다른데, 그저 훈련을 시키기 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마라톤을 완주하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서 나의 답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거예요. 

 

Q: 뭘 할 때 가장 행복하세요?

A: 행복은 추상적인 건데, 추상적인 개념은 인간의 의지로 언제든 창조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제가 행복하고 싶을 때 행복하다고 말해요.

 

   

 

(이미 폐간된 잡지인데다, 인터넷에서 이 분의 다른 인터뷰 기사를 찾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제가 일일이 손으로 쳐서 옮겼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른 분들과 꼭 나누고 싶었답니다.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신 유병만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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