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김성우 교수님이 쓰신 <단단한 영어 공부>(김성우 / 유유)를 읽었습니다.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젠가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 친구가 헤어질 때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며 “아뇽”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안녕’의 발음이 서툴러 “아뇽”이 되고 말았죠.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인사가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까닭은, 그 친구가 한국말을 잘해서가 아니에요. 한 번도 배워 보지 않은 한국어로, 아니 친구의 모국어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저자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아뇽”은 서툴지만 위대했어요. 부정확했지만 아름다웠어요. 한국어를 오래 공부하지도 않았고 유창하게 구사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맺은 관계 속에서 한국어를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순간 그 한마디가 빛을 발했습니다.
습득,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습득이 지상과제가 되는 언어학습은 앙상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은 더 가지지 못한 사람을 향한 멸시, 더 많이 취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김성우 선생님은 우리의 삶이 영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영어공부는 나를 어떻게 바꾸어 가고 있는지, 영어를 통해 어떤 소통에 참여하고 있는지 계속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아가 영어를 배우고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바꾸어 가야 합니다. 공부의 목적은 습득한 양이 아니라 소통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의 외국어 공부는 정말 즐겁습니다. 홀수달에는 하루 30분씩 짬날 때마다 일본어나 중국어를 공부하고요, 짝수달에는 그 언어를 쓰는 나라로 여행을 갑니다. 2월에 3주간 대만 여행을 다닐 때, 편의점에 가면 이렇게 중국어로 말문을 엽니다. ‘니하오, 워 쉬 한궈런. 워 썅 마이...’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제가 사고 싶은 건요....’ 외모상으로 대만 사람과 한국인은 차이가 없기에 이렇게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 소통을 시작합니다. 중국어를 공부하지만 시험을 보지 않는 제게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매일 조금씩 늘어가는 성장의 기쁨만이 있지요.
우리 사회는 영어교육에 천문학적 액수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취학 전부터 시작해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교육까지, 공교육 사교육을 가리지 않고 큰 비용을 치르며 영어를 배웁니다. 그렇다고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아요. “몇 년을 공부했는데 입도 뻥긋 못 하냐”는 한탄이 지배적이지요.
우리 사회가 영어와 맺는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 시작은 ‘영어가 나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저에게 영어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문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매일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성장 경험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부족한 나를 먼저 보듬습니다. 일본어나 중국어를 처음부터 잘 할 수도 없고, 조금 공부했다고 금세 유창해지지도 않는다는 걸 인정합니다. 부족해도 말을 아끼지는 않습니다. 여행지에서는 늘 그 나라말로 말을 걸려고 노력합니다.
외국어를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정확성에 나름 자신이 생길 때까지 문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다리지요.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오랜 시간 ‘부정확하게 말하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정확에서 정확으로의 변화는 온/오프 스위치처럼 작동하지 않습니다. ‘부정확’不正確에서 ‘부’不를 떼어 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확성이 발달하려면 부정확을 용인하고, 부정확하게 느껴지더라도 용기 있게 말하고, 나아가 부족한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부정확에 야유와 조롱을 보냅니다. ‘문법이 엉망이군’이라거나 ‘발음이 왜 저 모양이냐’는 눈빛이 도처에서 감지됩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옹알이를 하고, 서툰 발음으로 말소리를 내고, ‘엄마’를 정확히 부르는 데만도 수십 개월이 걸렸습니다. 모국어 체계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외국어를 배우는 상황이라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죠.
‘원어민과 같은 정확성’이나 ‘미국식 발음’이라는 족쇄를 풀고 소통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좀 더 정확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용기와 함께 말은 자라납니다. 함께 기억하고 서로를 응원했으면 합니다.

최근 OTT를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쉽게 접하게 되면서 드라마로 영어를 공부하려는 분도 부쩍 늘었습니다. 드라마를 많이 본다고 영어가 저절로 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막 없이 무조건 영어로 보려고 합니다. 꾸준히 들으면 늘겠지 하는 생각에. 그런데 중요한 대목에서 이해가 안 갑니다. 내용 전개를 따라가기 힘드니 영어 자막을 켭니다. 회화 청취 공부가 갑자기 독해 공부로 바뀌고요. 그나마 자막을 채 읽지도 못했는데 금세 바뀝니다. 결국 장면을 못 보고 글만 계속 보고 있어요. 이러려고 내가 드라마를 틀었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옵니다. 결국 한글 자막을 켭니다. 아, 이제 드라마 보는 재미를 온전히 누리네요. 그냥 한글 자막으로 계속 시청합니다.
김성우 저자는 드라마를 활용한 영어 공부를 위해 새로운 방식을 제안합니다. 먼저 좋아하는 미드나 영드를 고릅니다. 한글 자막으로 한 번 봅니다. 내용에 집중하며 즐겁게 시청하는 거죠. 그런 다음 가장 좋아하는 극중 인물을 고릅니다. 주인공이 좋겠지요. 대사도 많고 자주 나오니까요. 같은 에피소드를 영어 자막을 켜 놓고 봅니다. 이번에는 자기 배역을 연기합니다. 단지 영어 표현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표정이나 말투까지 완벽하게 따라 해 봅니다. 어려운 대목은 스페이스바를 눌러가며 정지 화면을 보며 연습합니다. 이 작업을 반복하고요.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배역 하나를 소화하게 됩니다. 단순히 듣고 따라 말하는 연습이 아니라 ‘되어 보는’becoming 연습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할 수 있지만, 몰입하다 보면 재미가 납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 너무 어려운 드라마를 고르지는 마세요. 정치 드라마나 법정물은 대사가 어렵고 빨라 쫓아가기 어렵습니다. 애니메이션이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대사가 빠르거나 길지 않아 학습용으로 적당하다고요.
삶을 위한 영어공부는 ‘느린 공부’를 지향합니다. 시험을 위한 영어, 스펙을 위한 영어를 넘어 읽고 말하고 곱씹고 성찰하고 소통하고 상상하는 영어를 꿈꿉니다. 저자는 영어 공부에서 느리게 배우기, ‘슬로러닝’을 강조합니다.
‘단기 속성’ 방법이 아니라 ‘장기 숙성’ 공부를 지향한다고요. 은퇴자의 외국어 공부도 그래요. 뭔가 목표는 없습니다. 한 해에 하나의 언어를 정하고 그 말을 쓰는 나라를 짝수달마다 다니면서 조금씩 늘기를 소망합니다. 학원에 다니지도 않고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취미의 영역에서 하는 공부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목적 없이 새로운 외국어를 하나둘 배워가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어려서는 영어가 삶의 수단이었습니다. 더 좋은 학교에 가고, 더 좋은 직장에 가기 위한 수단. 수단으로 공부를 할 때는 즐거움이 반감됩니다. 아무리 즐겁게 해도 소정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것 같거든요. 이제 저는 외국어 공부가 그 자체로 목표에요. 이걸 통해 이루고 싶은 건 없어요. 어차피 일본어를 못해도 일본 여행을 다닐 수 있어요. 다만 저는 현지 간판을 읽고 현지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는 재미를 느끼고 싶어요. 공부가 그 자체로 목적인 삶, 이게 제가 늘 꿈꾸는 노후였어요. <칠곡 가시나들>에서 문해학교를 다니며 한글을 공부하는 할머니들의 삶에서 배운.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하는 저는 유창하고 빠르게 말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느릿느릿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소통은 진심이 드러나는 게 우선이니까요. 언어 능력이 성장하듯 나 자신도 조금씩 성숙해가기를 소망합니다.
외국어 공부의 즐거움이 오래 오래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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