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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아까운 책 2012, 맛보기~

by 김민식pd 2012. 4. 25.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기에, 난 책 권하는 책을 즐겨 읽는다. 독서의 외연을 넓힐 수 있어 좋고, 한 권의 책을 읽고 여러 권의 책을 읽은듯한 지적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2011/11/16 - [공짜 PD 스쿨/100권읽기 추천목록] - 100권 읽기 추천목록 11. 책 권하는 책

 

블로그에서 책 권하는 책, 포스팅을 올렸는데, 출판사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작년 한 해 나온 책 중에서 아까운 책 한 권을 골라달라고. 파업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차라, '감사합니다!'하고 냉큼 물었다.

 

'2011 아까운 책', 새로운 책을 향한 입맛을 돋구게 하는 좋은 글들의 향연이다. 필진도 정말 화려하다. (나 빼고^^) 일독을 권한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숨은 보물을 찾기 위한 최고의 길잡이다.

 

 

일전에 부키 출판사에서 최신 베스트셀러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등 100권에 가까운 책을 MBC 노동조합 사무실로 보내주셨다. 파업 중이라 시간은 넘치고, 돈은 딸리는 조합원들에게 책은 최고의 선물이다. 부키는 예전에 장하준 교수의 책이 국방부의 불온 서적 지정되는 통에 책 판매에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 MBC 불법 파업 지원에 나서 또다른 대박을 예고하고 있다. ^^ 

 

사진 이미지는 반이정님의 블로그에서 무단 전재했다. 반이정님이 시비를 거시면, 평소 그의 글을 흠모하던 처지라 이 기회에 친구먹을 좋은 기회로 삼겠다. ^^

 

자, 이제 책에 실린 본인의 졸고를 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무료 써비스한다. ~~~  

 

SF 명예의 전당: 상상력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몇 년 전, '내조의 여왕'이라는 드라마를 공동 연출 한 후, 쉬면서 취미로 SF 소설 번역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편집자가 내게 물었다. '왜 드라마 피디가 취미로 SF 소설 번역을 하나요?' ‘원래 직업이 SF 번역가인데, 취미로 드라마 연출을 하고 있는 겁니다.' ^^

 

나는 SF 마니아다. 어려서부터 SF 소설을 좋아했고, 번역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회사도 그만두고, 외대 통역대학원에 시험을 봤다. 운 좋게 입학해서 학교를 다녔는데, 영어를 국내에서 독학으로 공부한 터라 통대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좋아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소설을 번역했다. 매일 2시간씩 자기 전에 번역해서 나우누리 통신 동호회에 올린 게 1996년의 일이다. 당시 아시모프의 미공개 소설을 찾기란 참 쉬웠다. 평생 500권의 책을 냈다는 레전드 급 다작 작가 아닌가. 난 통대 졸업하고 일거리가 없으면, 아시모프가 쓴 소설만 번역해도 평생 먹고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번역한 소설을 출판까지 했으니 SF 번역 작가의 길이 눈앞에 열리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TV에서 MBC PD 공채 공고를 봤다. 'PD라면 예쁜 가수랑 여배우도 많이 본다던데... 재밌겠다!' 라는 생각에 시험에 지원했다가 덜컥 붙었다.

 

이듬해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MBC에 입사했다. 방송이나 미디어를 전혀 배운 적이 없어 겁이 나긴 했지만, ‘취미삼아 해보고 안 되면, 다시 SF 번역하면 되지 뭐.’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다. 그렇게 취미 삼아 시작한 게 시트콤 연출이고, 드라마 연출이다. 문제는 그 취미 생활에 푹 빠져 15년째 계속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본업인 SF 번역을 하기에 연출이라는 취미는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다는 거?

 

취미로 드라마 연출을 하는 SF 번역 작가가 드라마를 만드는 법.

 

드라마를 어떻게 만들까? 그 비결을 알려드리자면 아주 간단하다. '만약에 ~이라면?' 이 하나의 상상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역사 속 비극을 떠올려보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뺏고 목숨까지 뺏는다. 이 익숙한 역사적 사실에 드라마 작가는 하나의 상상력을 더한다. 만약 왕위를 찬탈하려는 수양대군에게 딸이 있고, 단종을 지키려는 김종서 장군에게 아들이 있어, 둘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그 결과가 바로 '공주의 남자'다.

 

결국 모든 드라마는 단 하나의 상상에서 출발한다. '만약 ~이라면'. 우리 문화계 전반에 걸쳐 가장 놀라운 상상력이 집대성된 장르가 있다면? 바로 SF. '만약 외계인이 있어 지구 침공을 감행한다면?' '만약 시간 여행이 가능해 과거 공룡 시대로 간다면?' '만약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로봇을 만든다면?' '만약 어느 날 내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이 생긴다면?'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기를 바라는 작가나 연출이라면, SF를 뒤져볼 것을 추천한다.

 

그러면 어떤 SF를 읽을 것인가?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고전 문학에서 창작 공부를 시작하듯이 창의성을 키우려는 이들에게는 SF의 최고 고전을 권해드린다.

 

미국 SF 작가 협회는 1965년 창립된 뒤 이듬해부터 매년 최고의 성취를 이룬 작품에 상을 수여해왔다. SF 마니아들 사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사랑받는 네뷸러 상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SF 작가 협회는 1966년 이전에 발표되어 네뷸러 상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작품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영예를 수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년간의 추천과 투표를 통해, SF 최고의 고전을 엄선한 책이 바로 'SF 명예의 전당'이다.

 

국내에서는 SF 전문 출판 임프린트인 오멜라스를 통해 2010년부터 번역 출판되고 있는데, 2011년에 제 4'거기 누구냐?'가 나왔다. 이 한 권의 책에는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지금까지 쓰인 최고의 SF!" 라고 격찬한 존 캠벨의 '거기 누구냐?'. ‘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이라는 영화의 원작인데, 영화도 재밌지만 역시 원작 소설의 공포가 영상을 압도한다. 드라마 PD로서 부족한 연출력을 아쉬워하며 늘 고민하는 점이기도 한데, 글을 읽고 머릿속에 그려본 이미지를 화면에 옮겨진 이미지는 따라잡지 못한다. 영상매체의 제작자를 꿈꾸는 이들은 먼저 활자중독자가 되어야한다. 그래서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을 연습해야 실제 화면으로 옮기는 연출도 가능하다.

 

'거기 누구냐'는 영화 '신체강탈자의 침입'이나 만화 '기생수'처럼 '내 옆의 누군가가 과연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을까?'라는 서늘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외계인의 신체 침입이라는 소재는 언뜻 황당무계해 보이지만, 의외로 드라마로 옮겨오면 비슷한 변주가 가능하다. ‘나의 아내와 점 하나 빼고 똑같은 저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낯선 여자에게서 아내의 향기가 난다.' ‘아내의 유혹에 나오는 장서희는 점 하나 찍고 나타나서, 자신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너희가 아는 그 여자가 아니다'라고 집단 최면을 건다. ‘스타 워즈에서 제다이 기사들이 수련했다는 마인드 트릭! 한국 드라마에서 SF의 냄새를 맡는 건 반가운 일이다.

 

테오도어 스터전의 '아기는 세살'은 놀라운 신인류의 탄생을 그린 초인소설이다. 흔히들 슈퍼히어로물이라 하면, 미국 마블코믹스가 내놓는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을 떠돌린다. 한국 대중문화가 낳은 최고의 히트작도 실은 슈퍼히어로물이다. 바로 MBC 드라마 '대장금'. 장금이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절대 미각이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였는데 왜 홍시 맛이 나냐고 물으시면..." 드라마 대장금은 자신의 초인적인 능력, 바로 절대미각을 이용해 사랑을 구하고, 임금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내용이다. 모든 한국 사극은 평범한 사람이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 즉 슈퍼 히어로 물의 변형이다.

 

드라마 피디나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은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 소설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 MBC 사극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주인공이 어떤 아이템(신궁이나 천서)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친구를 만나는데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착한 주인공의 주위에 모여들어 결국에는 주인공을 도와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한다. 이는 바로 반지 원정대의 기본 플롯이 아닌가!

 

레스터 델 레이의 '대담한 신경'은 방사능의 공포를 그려낸다. 1942년에 처음 발표된 소설은 마치 체르노빌과 2011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예견한 듯해서, 다시 한 번 SF 작가들의 예지력과 상상력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명예의 전당 4권에는 이외에도 SF의 고전 웰즈의 '타임머신'과 잭 윌리엄슨의 '양손을 포개고' 등이 실려있다.

 

명예의 전당’ 4권은 인류의 상상력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SF의 하위 주제들, 외계인 괴물, 과학기술적 디스토피아, 초인간, 시간여행, 과학기술의 재앙 등에서 사실상 효시 격인 작품들을 총망라한다. 이들 작품을 통해 미래 문화 산업에서 스토리텔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상상력을 키우고, 나아가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의 지평을 넓힐 수 있으면 좋겠다.

 

끝으로, 고백 하나. ‘내조의 여왕이 끝나고 내가 번역한 작품은 바로 명예의 전당 5에 실릴 예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중편 소설 화성인의 길과 또 다른 초인 소설 은닉’, 2편을 번역했는데, 이제껏 나온 명예의 전당시리즈의 판매가 부진해서 5권의 출간은 현재 답보 상태다. 부디 아까운 책에 선정된 것을 기회로 책의 판매가 늘어서, 15년 만에 번역한 나의 원고도 세상에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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