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무엇이든 단순했다. 버스 종점은 딱 한 곳이고 버스 노선은 종점을 가는 세 가지 방법이었다. 그런데 서울 버스 노선은 어찌 그리 어려울꼬! 심지어 버스 정류장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동대문으로 갈라카모 버스 어디서 타능교?” “저기 단성사 앞에서 타세요.” 그날 한참을 헤매었다. ‘서울 시내에 절이 다 있나?’ 아무리 찾아도 단성사라는 절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리도 설었지만, 말도 낯설었다. 아니 TV에서 많이 봐서 서울말은 익숙했다. 문제는 내가 사투리를 한다는 자각을 못하는데 있었다. 가게에 물건 사러 가면, 최대한 서울 억양을 흉내내어 묻는다. “저 가방 얼마에요?”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가, “학생, 경상도에서 왔나봐?”하길래, “어? 어예 알았능교?” 했다. 그때 아저씨의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내가 경상도에서 온 걸 어떻게 알았지?’
버스를 타려면 사람들에게 정류장 위치도 묻고, 노선 번호도 묻고, 버스 기사에게 정류장 위치도 물어야하는데, 그때마다 사투리로 촌놈 티 팍팍 내는 게 싫었다. 천성이 짠돌이라 택시 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고. 결국 촌놈에게 만만한건 지하철이었다. 서울시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지하철 노선도. 그래서 매일같이 지하철만 타고 다녔다. 그랬더니, 서울 지리는 까막눈이었다. 내게 서울은 면과 면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점과 선으로만 연결된 2차원 도시였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서울 시내를 구경한 건 87년 6월의 데모 덕분이었다. 어리바리한 촌놈이 데모에 따라 나갔다가 서울 지리를 몰라 죽을 고생했다. 지하철 입구마다 전경들이 지키고 있어 결국 골목으로 도망가야 했는데, 지리를 모르니 어디가 어딘 줄 아나? 서울 땅 넓은 건 그때 처음 알았다. 넓은 서울 시내를 뛰어다니며 지리를 익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서울역 앞으로.” “저건 뭐야?” “저긴 시청이야.” “아, 그렇구나. 저건 뭐야?” “저건 남대문이야.” “아, 그렇구나.” 그게 촌놈의 첫 서울 구경이었다.
입주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었던 시절, 서울의 물가는 감당 불감당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돈을 벌어도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 사기란 언감생심 불가능한 미션처럼 보였다. 이렇게 물가 비싼 동네에서 우예 사노?
서울에서 산 지 20년이 넘어, 이제 촌티는 벗었지만, 짠돌이 근성은 아직도 못 버렸다. 기름 값이 오른 요즘은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애용한다. 서울에서 버스 타기, 이제는 두렵지 않다. 지하철과 무료 환승이 되니 마음 편하게 이용한다. 스마트폰 어플인 서울 교통이나 대중교통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어디나 마음껏 찾아다닌다.
외국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서울에서는 집에 앉아 버스 도착 시간을 알 수 있다’고 했더니 다들 혀를 내두른다. 이제는 다음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집에서 출발한다. 서울만큼 대중교통 체계가 저렴하면서도 잘 되어있는 도시는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없는 것 같다. 싸면서도 안전하고 심지어 환경 친화적이기까지 하니, 서울의 대중교통은 이제 해외에 나가면 최고의 자랑거리다.
사실 이제 여행가기 위해 굳이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다. 돈 안들이고 노는데는 서울이 최고다. 전철 타고 찾아가는 걷기 여행지가 얼마나 많은데.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가려면 생업을 한 달 정도 포기해야 한다. 그 좋다는 제주 올레라 해도, 적어도 2박 3일 이상은 시간을 내어야 한다.
북한산 둘레길은 주말 오전 3시간이면 국립 공원을 보고 올 수 있다. 세계 어느 수도를 가 봐도 국립공원을 품고 있는 도시는 없다. 전철 타고 오르는 명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도시, 서울은 최고의 짠돌이 놀이터다.
요즘은 서울시에서 추천한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을 주말마다 찾아다니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얼마전에는 3호선 수서역에서 내려 대모산 숲길을 걸었다. 비룡산 꼭대기에서 강남 일대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그 빼곡한 강남 아파트 숲을 보면, 저 많은 아파트 중에 내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는데, 요즘은 돈 한 푼 없이도 이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구나, 하는 만족감이 든다.
살아보면 살아 볼수록 멋진 도시다. 한강을 따라 자전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도 좋고, 북한산이나 청계산을 올라 등산을 하기도 좋고, 산과 강을 잇는 산책로를 걸어도 좋고. 돈 한 푼 안들이고 놀 거리가 이렇게 무궁무진하다니.
뮤지컬 영화 ‘시카고’에서 노래하듯 결국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You can live the life you like, or you can like the life you live.’
좋아하는 삶을 살거나, 살고 있는 삶을 좋아하거나.
오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북한산 둘레길로 간다. 산을 걸으며 올 한 해 수고했다고 나를 토닥거려줄 것이다. 내일은 한강을 달리며 아침에 떠오르는 새 해를 맞을 계획이다.
내게 서울은 짠돌이 놀이터, 즉,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다.
청계천 등축제와 대모산 숲길, 그리고 여의도 불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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