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고등학교 진로특강에 가면 아이들이 물어본다. “드라마 피디로 살면서 가장 힘든 때가 언제인가요?” “내가 이 학교 전교 꼴찌라고 생각해봐요.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좀 덜 힘들어요. 그런데 전교생이 그걸 알고 우리 동네 사람들까지 안다고 생각해봐요. 사는 게 힘들겠지요? 저는요, 드라마 시청률 꼴찌를 하면 뉴스에 나고 온 국민이 다 알아요.” “그렇게 힘들 땐 어떻게 하나요?” “일단 이게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덜 힘들거든요.” “다 내 탓이라 하면 더 힘들지 않나요?”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나중에는 이게 덜 힘들어요.”
시청률이 부진할 때 찾아오는 유혹이 있다. 남 탓을 하자는 유혹이다. ‘작가가 대본을 잘 못 쓴 거야.’ ‘배우가 연기를 잘못한 거야’ ‘카메라 감독이 잘 못 찍은 탓이야.’ 이런 유혹에 굴복하면 당장 내 마음은 편해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성장의 기회를 잃게 된다.
작가나 배우는 예민한 사람들이다. 대중의 외면을 받으면 상처받는다. 이때 리더로서 감독의 역할은 상처 받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면 위로가 어렵고, 결국 상대를 외면하게 된다. 시청자의 무관심보다 더 아픈 건 감독의 배신이다. 결국 소문이 퍼진다. ‘그 감독은 작품 안 되면 작가/배우 탓 하더라.’ 인생은 평판 게임이다. 나와 함께 일을 한 사람들을 등지고 좋은 평판을 쌓는 길은 없다.
드라마 피디가 살 길은 하나다.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모든 걸 다른 사람 공으로 돌리고, 쪽박을 차면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고개를 숙인다. 작가와 대본을 고르고, 배우와 촬영진을 꾸리는 것도 감독의 일이다. 나와 함께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 일을 제대로 못했다면, 둘 중 하나다. 사람을 잘못 뽑았거나, 업무 지시를 잘못 했거나. 둘 다 감독의 잘못이다. 리더십은 극한의 오너십이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이 바로 리더다.
나이 스물에 나는 무척 불행했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걸 좋아했기에 문과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나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 했다. 수학을 못하는 나를 억지로 이과로 보냈고, 성적이 낮아 결국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는 하루하루가 다 괴로웠다. 국문과나 영문과 학생들을 부러워하며, 매일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다.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스물에 불행한 건 아버지 탓이다. 그런데 내가 나이 마흔에도 불행하고, 쉰에도 불행하다면 그것도 아버지 탓일까? 나이 스물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공대 전공을 포기하는 대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매일 찾아갔다. 국문과 청강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읽고 싶은 소설을 읽고 저자들의 강연을 쫓아다녔다. 영문과 독학생이라는 자세로 혼자서 영어 회화 교재를 외우고 도서관에서 빌린 원서를 탐독했다. 내 삶의 조건을 바꿀 수는 없어도, 내 삶의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다.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찾아오는가?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믿는 순간, 삶은 변화한다. 남이 망친 인생이라며 남 탓만 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해결책이 내게 있다고 믿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망하면 나는 또다시 도서관으로 간다. 내가 하는 고민을 누군가 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고민의 결과, 자신이 찾은 답을 책에 글로 남겼을 것이다.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법, 실패의 두려움을 딛고 다시 도전하는 법, 창작의 고통을 극복하는 법을 책에서 찾아본다. 내가 공부한 내용을 함부로 타인에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작가에게 작법의 기본에 대해 충고하는 대신, 내가 더 좋은 대본을 고르는 방법을 고민한다. 내가 배운 것을 남에게 적용하면 상처가 될 수 있다. 나 자신을 향할 때 진짜 공부가 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제는 기뻐한다. 내게 또다시 성장의 기회가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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