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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입덧이 그렇게 힘든가?

by 김민식pd 2018. 6. 8.

MBC 주말특별기획 <이별이 떠났다>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대학생인 정효 (조보아 분)가 임신해서 남자친구의 엄마인 영희 (채시라 분)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묘한 동거를 하던 정효가 심한 입덧으로 쓰러지지요. 바람난 남편에게 상처받고 집에서 칩거하던 영희는 당황합니다. 지난 몇 년, 바깥 나들이를 한 적이 없는데, 쓰러진 아이를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처음 대본을 읽을 때, '입덧이 그렇게 힘든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정효가 쓰러져 정신을 잃어야 영희의 고민이 살아나고,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딜레마가 살아나거든요. 심한 입덧으로 고생하는 정효의 모습을 그려야하는데, TV 화면에서 계속 변기를 붙들고 토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어떨까 싶었어요. 입덧으로 힘들어하는 장면이 과장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어요. 그때 마침 촬영 짬짬이 읽던 책이 있었어요. 1945년생 전순예 선생님이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을 묘사하는 이야기인데요. 1960대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생긴 일입니다.


이웃의 예쁜 옥순이는 시골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도시로 시집갔습니다. 봄에 공무원한테 시집가서 잘사는 줄만 알았는데, 추석 때 거무(거미)같은 몰골로 시댁 어른들과 같이 친정에 왔습니다.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중병이라도 들어서 쫓겨오기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임신한 지 3개월인데 입덧이 심하여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밤밥이 먹고 싶다고 해 시댁 어른들이 시장에 가서 제일 좋은 밤을 사다가 밥을 해줬는데, 한 수저도 먹지 않고 우리 집 무쇠솥에 줄콩을 넣고 한 밤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왔답니다. 시댁 어른들은 "입맛도 촌스러워가지고 고기반찬도 먹지 않고 유별을 떤다"고, 며느리의 입덧이 마치 우리 집 밤밥 때문인 것처럼 갖은 퉁명을 다 떨면서 "고기랑 많이 사왔으니 미안하지만 밤밥을 해달라"고 합니다. 가뜩이나 일손이 바쁜 가을이라 퉁퉁대는 시댁 어른들을 보면 해주고 싶지 않지만, 거무 같은 몰골의 옥순이가 불쌍해서 얼른 울타리에 있는 각종 줄콩을 따다 깝니다. 

(중략)

고실고실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예쁜 밥을 큰 사발로 하나 수북이 차렸습니다. 옥순이네 시댁 어른들은 무슨 밥을 중앙청 꼭대기같이 담았느냐고 밥그릇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한 수저를 떠보고는 밤이 시내 밤하고는 모양부터 다르다고 무슨 금맥을 캐는 것같이 먹어도 먹어도 새로운 콩이 나오냐고, 이렇게 향기가 나는 쌀밥은 처음 먹어본다고 야단스럽게 먹습니다. 중앙청 꼭대기 같다던 밥그릇이 바닥이 났습니다. 옥순이는 게눈 감추듯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먹겠다고 하여 조금 쉬었다 더 먹으라고 달랬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모두 표정들이 밝아졌습니다. 옥순이네 시댁 어른들은 입덧이 멎을 때까지 친정에 있으면서 밤밥을 많이 먹고 오라고 옥순이를 두고 갔습니다. 옥순이는 즈네 집에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밤을 줍고 때마다 콩을 까고 푸성귀를 뜯어다 우리 어머니를 도와 반찬을 만들어 잘도 먹습니다. 

옥순이는 한가을을 우리 집에서 보냈습니다.

(<강원도의 맛> (전순예 / 송송책방)  228쪽)




'아, 나는 입덧에 대해 제대로 몰랐구나.' 입덧이 심한 사람은 중병 걸린 사람처럼 몰골이 되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아내도 입덧으로 고생을 했을 텐데 왜 나는 기억이 없을까요? 그게 아마 한국의 남자들이 가진 슬픈 딜레마가 아닐까 싶어요.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저는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의 조연출로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어요. 아내를 보살필 여유가 없었지요. 결국 아내는 친정에 가서 장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기를 지켰어요.  

극중 정효는 엄마가 없어요. 정효가 어렸을 때 엄마가 집을 나갔거든요. 엄마가 없는 정효는 남자친구의 엄마를 찾아오지요. 책을 읽으며, 죽을 것처럼 힘들어 친정 마을을 찾아온 새댁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니, 갈 곳 없는 정효가 너무 불쌍해 보였어요. 힘든 고난의 시기를 보내는 정효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찍고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드라마 연출가에게 영감을 주신 <강원도의 맛> 전순예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드라마 얘기를 겸한 책소개구요. <강원도의 맛> 본격 리뷰는 다음에 이어집니당~^^


참 벌써 금요일이군요. 내일 저녁 8시 45분, 정효와 영희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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