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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60년만에 지킨 약속

by 김민식pd 2018. 6. 14.

지난번에 소개한 <강원도의 맛>의 작가 전순예 선생님은 1945년생 주부입니다. 

2018/06/08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입덧이 그렇게 힘든가?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요.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놀고 글을 배우는 게 참 좋았답니다. 그러나 바쁜 농촌이라 여섯살부터 부엌일을 돕고, 어른들이 농사일을 쉬는 비오는 날에만 학교에 가야 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문예부 활동도 했는데요. 시조 시인인 정태모 선생님의 지도로 동요, 동시, 산문을 쓰며 '어른이 되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웁니다. 그러나 스물 일곱에 일 많은 집 며느리가 되고, 평생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삽니다. 어려서 쓴 글짓기 노트를 가지러 친정에 갔더니 변소 휴지로  다 쓰고 마지막 한 장만 남아있습니다. 그걸 보고 또 남몰래 웁니다. 100여편이나 되는 동요와 동시가 사라졌어요. 작가의 꿈을 향한 밑천이 사라져 아주 망해버렸지요. 환갑에 아이들이 마련해준 여행비로 신학교에 등록합니다. 학교에 가서 자기 소개서를 쓰며 어린 날의 꿈이 소설가였다고 하니, 교수님이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써보라고 권하셨대요. 무엇을 쓸까요?


동화 같던 나의 고향 이야기를 썼습니다. 계절 따라 나물을 뜯고 강에서 고기를 잡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면 밤을 줍던 일이며, 심고 가꾸지 않아도 풍성했던 고향 이야기는 써도 써도 쓸 것이 많았습니다. 평생 마음으로 생각으로만 썼던 이야기들입니다. 

아들딸이 읽어보고 "우리 엄마는 진솔하게 글을 잘 써." 하며 칭찬하고 세 살짜리 손주한테 읽어주니 깔깔 웃으며 들어주어서 용기 내어 쓰게 되었습니다. (중략)

앞으로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이제는 '1945년생 주부'가 아닌 작가로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의외로 글을 쓰고 싶다는 많은 이들을 만납니다. 글이란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쓰지 않으면 못 쓰는 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쓰고 싶다면 모두 용기 내어 써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위의 책 350쪽)


인터넷 댓글을 일일이 확인하며 행복했다는 전순예 선생님. 여러 고마운 사람들 덕에 60년 만에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매일 댓글 달아주시는 여러분이 은인이에요!) 

인터넷과 정보화 시대가 준 선물이 무엇일까요? 전문가의 장벽이 사라졌어요. 옛날에는 신문에 맛집 기행 칼럼을 쓰는 음식 평론가가 있었고, 영화 전문 잡지가 여럿 있어 영화 리뷰를 전문으로 쓰는 영화 평론가도 많았고, 책에 대한 비평을 쓰는 문학 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예 비평 공모에 당선되어 등단을 해야만 했어요. 지금은? 누구나 맛집 블로그, 영화 유튜브, 북스타그램을 올리는 시대에요.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풀어낼 수 있는 시대가 지금 시대지요. 저는 앞으로 '60년 만에 지킨 약속'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령화 시대, 장수 사회니까요. 어려서 꿈이 영어를 공부해서 세계 여행을 다니는 것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어요. 어려서 꿈이 작가가 되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역시 기회는 많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재미가 되고 감동이 되는 시대가 왔으니까요. 

끝으로 <강원도의 맛>을 읽고 쓴 추천사를 올립니다. 


<강원도의 맛>을 읽는 내내, 감각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어린 시절 시골 풍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져요. 어머니가 고시랑고시랑 들려주는 정겨운 수다가 귓전을 울리고요.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입안에는 군침이 가득 고입니다. 이런 게 오리지널 '먹방' 아닐까요. 손주에게 옛이야기 들려주듯 흥겨운 수다를 풀어주시는 어머니 덕에 책장을 넘기다 말고 문득 추억에 젖어봅니다. 나이 70에 글 쓰는 재미를 알아버린 작가님 덕분에 오감충족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전순예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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