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작가 소설집 <시티 투어 버스를 탈취하라>(최민석 / 창비)에 보면 동명 소설의 속편이 나옵니다. 소설은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요.
이 소설은 본인의 데뷔작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의 후속편으로서, 전작에서 인물과 사건을 빌려왔을 뿐 그 성격과 성질은 물론, 싸가지까지 전혀 다름을 천명한다. 전작은 이 땅의 문학 중흥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으나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했으니, 본인은 제아무리 열심히 써봐야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되는대로 쓰기로 작정하였다. 하여 있지도 않은 전작의 아성을 스스로 무너뜨리고자 하는 문학적 자학의 시기에 당도하였으니, 본래 동생은 형과 반대로 나가는 법. 후속작인 이 작품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손에서 태어났으나 그 목적은 물론 성깔과 싹수까지 판이하게 다르니, 굳이 표현하자면 배다른 형제라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이 소설을 쓴 시기의 나는 예상치 못한 김태희 양과의 이별로 심한 충격을 받아, 밀물처럼 밀려오는 좌절감과 썰물처럼 쓸려가는 희망을 맥없이 바라봐야 했다. 따라서 이 원고가 개차반이라면 그건 모두 김태희 양 때문이다.
(위의 책 172쪽)
출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책을 읽다가 자꾸 웃음이 빵 터졌어요. 옆자리 사람이 흘깃 째려보더군요... 죄송합니다. 이런 글을 웃음기 없는 냉정한 얼굴로 읽을 수 있는 능력자가 못 되어서... 이런 책은 평소의 경우, 집에 와서 혼자 낄낄대며 읽지요. 거의 예능 프로 방청객 수준의 폭소가 쏟아집니다. 거실에서 딸들과 아내의 한숨소리가 들려옵니다. "니네 아빠, 또 시작이다..." 문제는 요즘 드라마 촬영 중이라 전철이 아니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이렇게 재미난 책을 드라마 끝날 때까지 아껴두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구요... 결국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구겨넣으며 얼굴이 시뻘개져서 책을 읽습니다. 그런 중년의 변태를 전철 속 사람들은 또 힐끔거리며 쳐다봅니다. 아, 이 작가님은 왜 이렇게 대책없이 웃기는 거야...
최민석 작가는 단편 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어요. 아마 그 단편을 세상에 내놓고 신인상을 받았을 때는 모름지기 그런 느낌이었을 거예요. '한국 문단에 알려라... 여기 최민석이 왔다고.' 그러나... 네, 한국의 출판계는 신인 작가에게 너그러운 시장이 아니에요. 한국의 지하철이 혼자 낄낄거리는 중년의 독자에게 너그럽지 않듯이... 야심차게 쓴 소설이 문단에 아무런 기여를 못했다고 자학 개그를 날리는 작가. '열심히 써봐야 아무짝에 쓸모없으니 되는대로 쓰기로' 결심합니다.
ㅋㅋㅋ 부끄럽지만 저도 그랬어요. 첫 책 <공짜로 즐기는 세상>을 내면서, 수십년 동안 매년 200권씩 읽어온 사람으로서 모든 공력을 이 책에 쏟아붓는다... 는 각오가 있었어요. 정말 열심히 썼는데, 시장에선 외면당했지요. 출판사는 문을 닫고, 책은 절판됐어요. 열심히 써봤자, 한국의 출판시장에서는 잘 안 먹히는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그냥 마음껏 써보자... 아내가 옆에서 "아니, 시트콤 피디가 쓰는 영어 학습서를 누가 읽냐고."하고 구박을 해도,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썼어요.
창작자의 자세란 무릇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을 낼 때, 감히 나의 글 한 줄로 세상을 바꾸기를 꿈꾸지요. 책을 내고 깨닫습니다. 나의 글 한 줄은 통장에 미미한 인세 한 줄 남기지 못하는구나... '이럴 바에야, 에잇!' 하고 때려치우지는 않아요. 어차피 돈벌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쓰면서 내가 즐거운 책을 쓰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요.
소설가로 등단하지만, 신인작가에게 원고 청탁은 드물어요. 문예지에서 지면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마냥 놀 것인가? 최민석 작가는 홈페이지에 그냥 에세이를 올립니다. 아무도 청탁하지 않은 원고를 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작가가 웃기려고 쓴 대목에서 저는 문득 진지해집니다.
인생, 뜻대로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인간의 도리는,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촬영장으로 향합니다. 즐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댓글로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엇이 두려운가? (7) | 2018.06.07 |
---|---|
고슴도치로 살아볼까? (9) | 2018.06.04 |
우리의 차이가 우리를 풍성하게 (9) | 2018.05.21 |
인생은, 내가 선택한 고통 (14) | 2018.05.18 |
너구리에게 배웁니다 (7) | 2018.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