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인생은, 내가 선택한 고통

by 김민식pd 2018. 5. 18.

여행중에는 전자책을 주로 읽습니다. 종이책을 들고다니면 짐이 늘어나서요. 작년 가을, 아버지를 모시고 사이판에 갔을 때 읽기 시작한 소설이 있어요.  

<스토너> (존 윌리엄스 / 이승욱 / 알에이치코리아) 

며칠 읽다가 이야기가 너무 심심한듯 하여, 그냥 넘어갔어요. 그러다 지난 2월 영국 출장 중 다시 보니, 전자책의 대여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아마 해외출장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책상 위에는 늘 도서관에서 빌려온 새로운 책들이 쌓여가기에 손이 가지 않았을 수도. 소설 <스토너>를 읽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어요.


스토너는 가난한 시골마을 출신입니다. 부모는 가난한 농군입니다. 그를 대학으로 보낸 농사꾼 아버지는 아들이 농화학을 전공한 후, 비료나 농약에 대해 공부를 해서 농사에 도움을 주라 희망하는데요. 아들은 엉뚱하게 대학에 가서 영문학과 사랑에 빠집니다. 중세 소네트와 라틴어 프랑스어 시에 빠져요. 아들이 책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 농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지요. 저는 스토너가 진짜 공부를 했다고 생각해요. 공부란 그런 것이지요. 사람을 바꿔놓습니다. 꿈을 바꿔놓습니다. 

저는 20대에는 춤추고 노는 거 좋아하는 딴따라였어요. 노조 집행부 일을 하고 글을 쓰게 된 건 1년에 200권씩 읽는 책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른의 김민식과 마흔의 김민식, 쉰 살의 김민식의 직업이 계속 바뀌는 것은, 제가 꾸는 꿈이 계속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다 독서 탓이에요. 책을 읽을 수록 생각이 자꾸 바뀌거든요.

영문학의 품안에서 마냥 행복할 것 같던 스토너의 삶이 불행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어요. 바로 사랑입니다. 스토너는 분에 넘치는 상대와 사랑에 빠져요. 부유한 은행가 가문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집니다. 부잣집 딸인 아내의 생활 기준에 맞춰 살려다 빚을 지고 점점 삶은 힘들어집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내리는 선택은 자신이 감당하는 고통이 아닐까. <신경끄기의 기술>에서 그러더군요. 우리는 꿈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을 선택하는 거라고. 록 스타의 꿈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타 코드를 잡으며 물집이 잡히는 손가락의 고통을 선택하는 거라고. 동시통역사의 꿈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매일 영어 회화를 외우는 고통을 선택하듯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와 <매일 아침 써봤니?>를 읽은 독자 반응 중, 왜 그렇게 피곤한 삶을 사느냐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러니까, 외국어 공부와 글쓰기는 제가 선택한 고통인 겁니다. 저는 이걸 고통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왜? 내가 직접 한 선택이니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는데, 결국 내가 선택한 고통이 나의 인생이더라고요.

스토너는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실패를 거듭합니다. 부모를 실망시키고, 아내를 실망시키고, 딸에게도 실망하지요. 그렇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까요?

이 소설은 1965년에 출간되었다가, 5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릅니다. 주인공만큼이나 참을성이 많은 작품입니다. 언뜻보면 스토너는 무척 답답해보이는 사람인데요.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저 역시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애정이 있고, 또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있는가?'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 오면, 일 외의 조건에서 그걸 찾지요. 제게는 지난 7년 그게 블로그였고요. 블로그 덕에 끊임없이 삶에 열정을 불어넣을 수 있었어요. 

<스토너>를 읽으며 다시 물어봅니다.

'내가 하는 일에 애정과 의미가 있는가?' 

애정하는 드라마 연출이라는 작업을 통해,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철 안 변태 중년의 사연  (9) 2018.05.28
우리의 차이가 우리를 풍성하게  (9) 2018.05.21
너구리에게 배웁니다  (7) 2018.05.16
갑자기 하루 쉬게 된 날  (12) 2018.05.10
2030세대의 노동 이야기  (11) 201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