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촬영을 하다보면 그런 날이 있어요. 갑자기 하루 쉬게 되는 날. 배우 스케줄이 안 맞거나, 장소 섭외가 꼬였거나, 갑자기 비 예보가 있거나, 하여튼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거지요. 조연출이 와서 촬영 스케줄이 꼬였다고 말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 왜?!"
제 나이 이제 50. 스트레스는 받지 않아요. 화를 낸다고 바뀌는 건 없다는 걸 알거든요. 무엇보다 그게 조연출 탓이 아니라는 걸 알거든요. 그냥 웃으며 말합니다. "덕분에 하루 쉬게 되었네? 고마워!"
원래는 아침 7시에 촬영을 나가 밤 12시를 넘겨 촬영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쉬게 되었습니다. 이런 날, 무엇을 할까요? 저는 제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도서관에 달려가 읽고 싶은 책을 한아름 안고 와요. 먼저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한 권 골랐어요. 연도별로 다 있기에, 아무거나 골라와도 됩니다. 오늘은 이기호 작가의 이름이 표지에 박혀있다는 이유로 2017년도 수상집을 골라왔어요. 페미니즘 단편집이라는 소개를 읽고 '19호실로 가다'는 책도 빌렸고요. 장대익 교수님의 '울트라 소셜', 그리고 듀나라는 이름을 저자란에 넣고 검색했다가 나온 '나는 어떻게 쓰는가'까지. SF작가의 책을 읽으려다 문득 글쓰기 책을 고르게 되었군요. 도서관에서 책 빌리는 일은 이렇게 소소하게 흥미진진합니다. 메모장에 쓰인 책제목을 쳐보다 문득 '꽈배기의 맛'이라는 책을 빌렸어요.
다섯 권을 뿌듯한 표정으로 안고 돌아오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꽈배기의 맛' 뒷표지를 살펴보다 이런 글을 읽었어요.
회사를 그만두며 전업작가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 "아르바이트를 할지언정 글에 대한 고집은 꺾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결국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어느 날 서점에 갔는데, 내 책 앞에서 두 여성이 달뜬 얼굴로 "글쎄 이 최민석이란 작가가 글 쓰는 데 술이 방해가 된다고 여겨서 백일 넘게 금주를 하고,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7~8km씩 달리고, 나중에는 오로지 글로만 생긴 수입으로 생활하기 위해 위까지 줄여가며 적게 먹었대. 그렇게 쓴 게 이 책인데, 지금 베스트셀러야. 어머머!"라는 건 역시 내 상상속의 일이다. 현실 속의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새벽 6시 반에 전단지를 잔뜩 들고 응암동의 한 남자고등학교 앞에 서 있었다. 남고 앞에서 새벽이슬까지 맞으며 전단을 돌리다가, 비굴하게 학생주임에게 고개까지 숙였다.
<꽈배기의 맛> (최민석 에세이 / 북스톤)
뒷표지의 글에 끌려서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는데요. 내내 즐거웠어요.
'이토록 성실한 글쓰기만이 이처럼 눈물겹게 웃길 수 있다'
'매일 쓰는 작가' 최민석이 빚어내는 짠하면서 유쾌한 에세이
읽는 내내 감탄했어요. 어쩜 이렇게 재미난 글을 쓸 수 있을까? 신기하면서도 부러운데요. 저자 서문을 보면 까닭을 알 수 있어요.
이 글은 청탁을 받지 않고 스스로 2년간 묵묵히 쓴 글이다. 소설가가 막 된 2010년 당시에 내게 에세이를 청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여, 나는 '까짓것 한 번 해보지, 뭐'하는 마음으로 혼자서 2010년부터 2012년 초까지 내 홈페이지에 에세이를 매주 한 편씩 써서 올렸다. 스스로 마감도 매주 금요일 6시로 정하고, 엄격히 지켜서 올렸다. 처음에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독자도 늘어나고, 응원해주는 사람도 생겨 힘내서 썼다. 그때, 내가 받은 최고의 보상은 '내게 글 쓸 시간이 무한정 있다'는 단순한 조건과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딱히 바라는 것은 없다. 그저, 여러분이 이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즐겁길 바랄 뿐이다.
(위의 책 7쪽)
작가님의 소망대로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어제 조연출이 "선배님, 내일 촬영은 취소되었습니다."라고 했을 때, 화를 내지 않기를 잘했어요. 만약 화를 냈다면, 미안했을 것 같아요. 그 덕에 이렇게 재미난 책을 읽게 되었는데 말이지요.
앞으로 최민석 작가님 책은 다 찾아읽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어쩌나요, 드라마 촬영하느라 바쁜 와중에 이렇게 재미난 작가를 발견해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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