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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도올 서당 학습기

by 김민식pd 2018. 7. 5.

저는 1992년에 첫 직장에 입사했습니다. 제가 모시던 상사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어요. 그 분이 전국 출장을 다니며 강행군을 하다 어느날 여관방에서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대요.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안 움직이는 겁니다. 과로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요. 제게 종종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김민식씨만할 때는 말이야, 허구헌날 야근을 했는데 말이야. 김민식씨는 항상 칼퇴근이야.' 하셨어요. 당신에게는 당신의 기준이 있고, 내게는 내 기준이 있는데 말이지요. 무엇보다 저는 당시 퇴근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거든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 데이트도 하고 싶은데, 그런 저를 보고 한심해 하셨지요. 결국 사표를 던졌어요. 인사부에서 부르더군요. 혹시 상사와 안 맞아서 그런 거라면 부서를 옮겨줄 테니, 재해보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어요.

퇴사하고, 외대 통역대학원 입시 준비를 했어요. 대학 도서관을 다니며 영어 공부를 했는데요. 어느날 학교에 붙은 공고문을 봤어요.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방학 동안 동양철학 강좌를 하신다는 내용이었어요. 당시 저는 도올 선생님의 책 '여자란 무엇인가'에 심취해 있었거든요. 바로 신청했지요.

논어 강독 수업이었는데요, 여름 방학 한 달간, 서당을 다니며 오전 3시간 논어를 공부했습니다. 졸업 시험은 한자로 '논어' 전편을 암송해서 쓰는 것이었어요. 절대 쉬운 공부는 아니지만, 무척 즐거웠습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에요. 통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한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으면, 하루 종일 영어만 공부해도 부족할 텐데, 그 와중에 동양철학 강좌를 들었다니... 

어쩌면 통대 준비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오기 위한 구실이었는지 몰라요. 회사를 그만두고 어디서든 마음껏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도올 서당을 다니며 논어를 공부한 겁니다. 무엇이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공부하는 그 순간이 즐거웠어요.

'굳이 통대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이렇게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다면...' 하고 느꼈어요.


요즘도 짬만 나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책에서 배운 내용을 글로 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제게 평생 가는 공부입니다.

스물 여섯 살, 첫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온 백수 시절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간만에 앨범에서 '도올 서당 졸업증서'를 꺼내 봅니다.

1994년 8월 6일이라는 날짜를 봐요.

평생 공부만 하고 살아도 좋겠다, 고 생각했던 그날의 각오를 되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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