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국 조연출로 일하던 어느 날 편집실 앞 복도에서 왜 우리는 이렇게 우울하게 매일 밤만 새는 걸까?’ 하고 조연출 선배랑 신세타령을 했어요. MBC 입사하기 전, 대학 시절 여행 다니며 즐거웠던 이야기를 하다 문득 우리 그냥 배 째고 주말에 놀러갈까?” 그렇게 조연출 선배랑 의기투합해서 전남 선유도로 23일 여행을 떠났어요. 시골 바닷가 마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시는 민박집에 묵었는데요. 마당에 개집이 있는데 개집에 문패가 있더라고요. ‘초복이네? 개 이름이 특이하네? 할아버지에게 여쭤봤어요. “어르신, 초복이는 어디에 있나요?” 할아버지가 멀뚱하니 보시면서 하신 말씀.

이 사람아, 초복 지났잖여!”

ㅠㅠ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 김영사)를 읽다가 갑자기 엉뚱한 대목에서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어요.

 

‘(어느 미국 대학 교수가) 햄릿과 오믈렛이라는 이름의 두 마리 돼지에게 특수한 조이스틱을 주동이로 제어하는 훈련을 시킨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돼지들이 간단한 컴퓨터 게임을 영장류만큼이나 잘 배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호모 데우스> 119)

 

번역본을 읽다가 문득 돼지 이름이 영문으로 떠올라 !”하고 웃음을 터뜨렸어요. 햄릿과 오믈렛. Hamlet & Omelet. Hamlet은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이지요. 그런데, 우리 식탁에 오르는 햄 Ham은 돼지고기로 만듭니다. -let은 작은 것, 무엇의 새끼를 일컫습니다. booklet이 작은 책자고, piglet이 새끼 돼지거든요. 돼지에게 hamlet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건 햄 새끼라고 불러준 거예요. 할아버지가 강아지에게 초복이’ ‘말복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랑 비슷하지요. 오믈렛은 그냥 let이라는 돌림자가 들어간 계란 요리 이름이고요. 영어를 공부하면 책을 읽으면서도 영어권 저자들이 구사하는 말장난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좋아요.

 

(포유류에서) ‘포유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 맘마 mamma’젖가슴이라는 뜻이다.

(위의 책 128)

 

아기가 배가 고파 울 때, 엄마의 젖가슴을 아이에게 물리며 맘마 먹자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맘마가 라틴어로 mamma이고, 이것이 영어로 mammal (포유류)의 어원이라니 정말 재미있지 않나요?

92년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저는 이제 막 문호를 관광객에게 개방한 헝가리와 체코를 간 적이 있어요.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저는 눈이 빨간 공산주의자를 만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기차에서 만난 건 우리를 닮아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들이었어요. 유럽 사람들은 갈색이나 파란 눈이 많은데, 헝가리는 눈동자가 우리와 비슷했어요. 당시 헝가리는 오랜 세월 공산국가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 동양인이 드물었어요. 아이들은 저를 보면 신기해했지요. 거리에서 저를 본 한 아이가 아빠를 부르더군요. “아빠!”하고. 깜짝 놀랐어요. 헝가리어로 아빠가 아빠’(apa)였어요.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여름방학, 취업 준비 대신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미친 짓 같지만, 생각해보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어요. 일보다는 노는 게 우선이거든요.)


4세기 후반 훈족이 침입한 후, 훈족의 나라라는 뜻으로 Hungary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요. 훈족은 서양사에 등장한 최초의 몽골계 민족이래요. 그래서인지, 헝가리는 아시아인과 생김새나 언어가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호모 데우스>를 읽다가 엉뚱한 대목에서 추억이 떠오르고, 재미를 느껴요. 생각해보면 이런 재미는 20대에 영어를 공부하고, 여행을 많이 다니며 지식과 경험을 풍성하게 만든 덕분입니다. , 오늘 내가 즐기는 것은 과거에 즐겁게 잘 논 나에게 빚지고 있어요.

나이 50, 저는 20대 시절 김민식 못지않게 열심히 책을 읽고, 잘 놀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요량입니다. 지금 나의 즐거움이 노후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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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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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아리 2017.11.07 06: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지금 나의 즐거움이 노후의 즐거움이 될것이다'
    이 말씀이 현재의 나를 즐겁게 해줘야 하는 강력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와닿습니댜. ^^
    'Carpe diem' 늘 되새기는 말인데 일상은 녹록치가 않아서 힘들때가 많은 요즘입니다.
    생각이 많아 복잡하고 괴로울때 , 나를 즐겁게 해줄 영어책 암송하기 하루치를 하면서 나를 끌어올립니다. Pd님을 나침반 삼아 동행할수 있어서 늘 감사하고, 행운이랍니다.

    끝까지 김장겸OUT!

  2. 쏘라 2017.11.07 0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You Only Live Once....^^

  3. 섭섭이 2017.11.07 1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햄릿과 오믈렛, 맘마에 이런 숨은뜻이 있었다니 재미있네요. ^^ 최근에 알게된 내용이 있는데요. 도대체(都大體), 어차피(於此彼), 하필(何必) 이런 단어들이 한자라고해서 놀랬어요. 단어 어원을 알면 재미는 내용이 참 많은거 같아요.

    오늘도 즐겁게 사시려는 PD님 보며 배웁니다. ^^

    #김장겸_고대영을_몰아내고
    #MBC,KBS를_되살리자
    #짧고_굵고_화끈하게

  4. 정지영 2017.11.07 12: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의분들 댓글보다 보니 저는
    'Amor Fati'가 생각나네요.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박웅현 작가는 아모르 파티가 자존의
    시작이라고 하셨죠. 오늘 제게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며 지금 이순간 즐겁게
    보내야겠어요.
    좋은 글로 항상 생각과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5. 이순간 2017.11.07 2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은 책을 읽다가 옛추억을 떠올리시고, 전 아침에 pd님의 글을 읽다가 옛추억이 떠올랐답니다.

    pd님보다 2년 먼저-저도 87학번인데 군대를 안가서 2년 먼저 가게 된건가 싶었어요- 헝가리에 여행갔었거든요. 당시 졸업을 1년 남기고 어학연수 명목(?)으로 독일에 있으면서 여행을 갔는데 기차가 헝가리 국경을 넘을 때부터 긴장되고, 여자 둘이 한밤중에 기차에서 내리니 정말 떨렸어요. 별 일은 없었고 여행은 너무 오래 전이라 전 기억이 거의 안나네요. 다만 맥도날드에서 만난 한국아주머니가 무슨 이유인지 저희를 피했던 기억(유치원생 정도되는 아들에게 저 누나들에게 아는 척 말라 시키고 본인은 얼굴을 한껏 가리고 있더라구요)...한국의 재래시장을 꽤나 닮은 헝가리 재래시장에서 사온 장아찌를 독일에서 김치로 변신시켜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밖에는요. 그러고보니 독일에서 가장 입에 맞았던 음식이 헝가리 굴라쉬 스프였어요. 정말로 헝가리에 동양적인 면모가 상당히 있어 보입니다.

    전 마음의 어떤 회로가 고장이 났는지 즐겁게 사는 걸 가장 못한답니다. 그래서 pd님의 삶과 글에 자꾸 이끌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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