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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책벌레, 전문가를 꿈꾸다

by 김민식pd 2017. 9. 8.

(지난 2편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2017/09/06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왕따, 책벌레가 되다

2017/09/06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책벌레, 미래학자를 만나다

기왕에 세일즈맨이 되었으니 일 잘 하는 사원이 되고, 성공한 직장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숱한 처세술 책과 세일즈 비법에 관한 책을 탐독했는데요. 직장 생활을 더 잘하려고 책을 읽다 그만 직장을 그만두게 만드는 책을 만납니다. 서점 한 구석에 꽂혀 있던 종신 고용의 시대가 끝난다라는 일본 경영서적인데요.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1993년 당시만 해도 일본이나 한국은 종신고용이 대세였어요. 첫 직장이 곧 평생직장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는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지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직장인들이라고 했어요. 70년대, 80년대의 고도성장 시기가 지나면 경제의 조정 국면이 올 것이고, 이때 여러 기업이 무너질 것인데, 회사가 평생 고용을 보장해줄 줄 알고 직장 안에서 안주한 사람은 밥줄이 끊길 거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졌어요.

책에서 21세기는 전문가의 시대라고 예언했어요. 회사에 목매고 사는 직장인은 언제든 구조조정으로 도태될 수 있기에 회사가 망해도 살아남는 것은 자기 실력을 갖춘 전문가뿐이라고요.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업의 최고 자질은 열정입니다.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뛰어난 세일즈맨이 될 수 있어요. 바꿔 말하자면 나보다 더 열정을 가진 후배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내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게 영업이에요. 아무리 열정만 있으면 된다 해도, 다단계 영업만은 하지마세요. 20, 가진 것 별로 없는 청춘들에게 그나마 가장 소중한 자산이 바로 자긍심과 주위의 신뢰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잃게 만드는 게 바로 다단계 영업입니다.

직장인을 위한 자기계발서마다 '대체재가 없는 사람'이 되라고 했어요. 누구나 다 하는 공통 스펙이 아니라, 자신만의 스펙을 갖추라고 말이지요. 고민 끝에 영업사원이라는 직장인에서 동시통역사라는 전문 직업인으로 인생을 바꿔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94년 봄, 1년 반을 다닌 첫 직장에 사표를 냈을 때, 주위에서 다들 말렸습니다.

함부로 회사 그만두지 마라. 그러다 조직 부적응자로 찍혀서 평생 백수 된다.”

그러나 저는 책의 예언을 믿고 싶었어요. 산업 중심의 시대에 세계화가 온다는 책을 읽고 영어를 공부했던 것처럼, 종신고용의 시대에 구조조정이 시작된다는 예언을 믿고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예언은 몇 년 후 현실이 되었습니다. 퇴사하고 4년 후인 1998년에 대한민국은 IMF라는 폭풍에 휘말렸어요. 초대형 폭풍 속에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무너졌습니다. 명예퇴직과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쫓겨났어요. 고용 안정성은 고도성장기만의 특수한 상황이라 외치던 경제학자들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지요.

순식간에 구조조정의 달인, 잭 웰치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마이크 해머의 리엔지니어링 이론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책들은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출간됐어요. 다만 책에서 예견한 미래가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입니다. 1998년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들이 쓰러지고, 한국 3M 역시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제 후임으로 입사한 후배가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5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전문가가 되라는 책의 조언에 따라 1995년 봄 외대 통역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이제 영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책이 좋아 책을 계속 읽다 그만 통역사의 꿈을 접게 만든 책을 만납니다. 바로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19세기 산업 혁명의 결과 인간의 육체노동은 기계가 대신해주고, 20세기 정보 혁명의 결과, 컴퓨터가 정신노동을 대신해주는 시대가 온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21세기는 인류가 처음으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유토피아가 될까요? 아니면 소수의 자본가가 생산설비와 산업을 독점하고 대다수 노동자는 노동의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디스토피아가 될까요?

1996년 여름에 읽은 이 책은 돌이켜보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미래 예견서입니다.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 소외 현상을 그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대규모 청년 실업과 고용 불안정은 20세기 말에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이미 예견한 그대로입니다. 이 책에서 저를 기겁하게 만든 대목은 따로 있어요.

 

버스 요금 자동 정산기로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이 사라졌듯, 향후 30년 내에 자동 통역기가 나와 통역사 역시 사라질 것이다.’

 

소사, 소사, 맙소사! 어렵사리 공부해서 통역대학원에 들어왔더니, 이 직업이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도대체 21세기에도 살아남을 직업은 무엇인가? 노동의 종말을 뒤져보았습니다.

 

미래에도 살아남을 직종은 창작자다. 지식의 2차 유통이나 재생산은 정보화 기기에 의해 대체될 수 있으나, 예술가나 미디어 창작자는 컴퓨터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다.’

 

컴퓨터가 소설 번역을 대신하는 시대가 올지라도, 소설을 창작하는 것은 오래도록 인간의 몫으로 남을 것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절묘한 시점에 TV에서 광고가 흘러나왔습니다.

"21세기 영상 문화를 선도할 MBC에서 창조적인 미디어 일꾼을 찾습니다."

그렇게 저는 통역사의 꿈을 접고 MBC PD 공채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물론 단순히 책 한 권 때문에 인생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남의 말을 옮기는 직업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영어는 도구이지, 그 자체로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전문 기술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영어 실력에 전문 기술을 더하면 영어는 더 강력한 도구가 되거든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인가 고민하던 시기에 노동의 종말을 읽고 머지않아 미디어 종사자가 각광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니, 결국 책 한 권에 인생이 뒤흔들린 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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