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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책벌레, 미래학자를 만나다

by 김민식pd 2017. 9. 7.

(지난 편에서 이어집니다.)

2017/09/06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왕따, 책벌레가 되다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당시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3부작을 접했습니다. 미래의 충격, 3의 물결, 권력이동, 3권의 책에서 토플러는 다가올 21세기가 20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어요. 지난 세상을 기준으로 앞날을 계산하는 건 완전 바보짓이고, 미래는 과거와 판이하게 것이라고요. 21세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책에서 찾았습니다.

앨빈 토플러 3부작,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 마이클 포터의 국가 경쟁 우위론, 읽는 책마다 모두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부상을 예고했습니다.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자 국제화 시대가 될 것이기에, 21세기형 인재는 영어 사용 능력과 국제 감각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아 역설했어요. 저는 책의 예언을 받아들여 영어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하루에 15시간씩 영어를 공부했으니 거의 고시 준비하듯 영어만 판 셈입니다.

요즘이야 영어가 기본 스펙이지만 1980년대 말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대학만 졸업해도 다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지금은 토익 점수가 입사지원서의 필수 기재 항목이지만 당시에는 토익을 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굳이 영어를 하려는 사람은 토플을 공부했지요. 저는 글로벌 비즈니스 시대가 오면 학술 영어인 토플보다 비즈니스 영어인 토익이 뜰 것이라 생각하고 토익을 준비했습니다. 1992년 초, 한양대에서 실시한 토익 시험에서 915점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대단한 점수가 아니지만 당시에는 한양대 전체 최고 점수였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지요.

 

책의 예언에 따라 선택한 미래의 직장은 무역상사였습니다. ‘상사맨이 되어 세계를 주름잡으며 한국의 수출 역군이 되는 거야!’ 국제 시장의 최전선에서 교역 정보를 다루는 데다 영어 사용 능력과 국제 감각을 익힐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책 읽듯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은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트렌드를 한 발 앞서 읽었다고 자부했건만, 당장 눈앞의 현실은 제대로 읽지 못했어요. 여덟 군데 회사에 원서를 넣었다가 일곱 군데에서 1차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습니다. 당연하지요. 무역학과 전공자를 뽑는데 공대생이 응시했으니. 게다가 영어에만 올인했던 저의 전공 학점은 2점대였거든요.

거듭되는 서류 전형 탈락에 참다못한 저는 당시 최고의 무역회사였던 삼성물산 인사과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삼성물산은 그해 공채가 없었고 특채만 실시했어요. 삼성 본관에 있는 인력개발본부를 찾아가 담당자에게 특채의 기준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관련 전공 성적 우수자나 외국어 특기자입니다."

전공은 아니지만,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는 최고 수준이라고 우기며 나를 뽑아달라고 졸랐어요.

"삼성은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그렇게 원칙 없이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삼성 본관을 나서면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장탄식했습니다.

"삼성이 천하의 인재를 잃는구나."

삼국지에 나오는 방통의 대사지요. 남에게 거절을 당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복이 부족함을 안타까워하지요. 그렇게 사는 게 정신 건강에는 좋더라고요.

효성물산에 서류 접수했을 때 겪었던 수모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자기소개서에 토익 성적표를 첨부했더니 접수하던 여직원이 그걸 떼어 내가 보는 앞에서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아니, 그걸 왜 버리시죠?"

"지정된 서류 외에는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시절에는 입사 전형에서 토익 성적표가 지정된 제출 서류가 아니었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것도 문제더군요. 무역회사는 비전공자라고 뽑아주지 않으니, 전공불문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영업뿐이었어요. 그래서 토익으로 입사 시험을 보는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인 한국 쓰리엠(3M)에 지원했습니다. 필기시험이 토익이었는데, 응시자 전체에서 1등으로 입사했습니다. 인생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합니다. ‘Made In Korea’ 한국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파는, 글로벌 시대 수출 역군이 되겠다고 영어를 공부했는데, 받아주는 회사가 없어 결국 미국 제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회사의 국내 영업 사원이 된 것이지요. 그게 인생입니다.

 

(영어공부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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