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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내가 '꿀알바'를 그만둔 이유

by 김민식pd 2017. 8. 31.

예전에 올린 <로봇의 부상> 후일담입니다.

2017/03/28 - [공짜 PD 스쿨/짠돌이 독서 일기] - '로봇의 부상', 그 이후의 세상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앞으로 우리는 '노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요? 로봇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 모두 기계와 컴퓨터가 대신하는 시대가 올 테니까요. 생산 활동은 기계에게 맡기고 우리는 창의적 유희를 즐기며 살면 어떨까요?


'함부로 상상하지 말라. 상상하는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영화 카피가 있지요? 앞으로는 '정보 기술의 유례없는 파괴적 힘' 때문에 이전의 산업 혁명과는 다른 양상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시대, 어떤 일자리가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예측하기 힘드니까요. 오히려 '일자리를 인공지능과 로봇이 가져간다면 우리는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를 고민해야할 것 같습니다.

 

<로봇의 부상>을 읽으면서 연신 그 유려한 번역에 감탄했어요. 책을 번역한 이창희 선생님은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저의 은사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번역 작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어요. 선생님은 당시 통역대학원 교수로 일하면서 여러 편의 기술서적을 번역하셨어요. 새로운 책을 번역하실 때는 통역대학원 학생 중 조수를 구하기도 하셨어요.

1996년 당시 선생님의 번역 작업을 도와드린 적이 있어요. 약속한 시간에 선생님의 집에 찾아갑니다. 서재에는 PC가 있어요. 제가 키보드 앞에 앉으면 선생님이 영어 원서를 앞에 펼쳐놓고 읽기 시작합니다. 한 문단을 읽고는 눈을 떼고 방금 읽은 문장을 순차 통역하듯 말로 합니다.

책의 문장을 보면서 번역을 하면 영어식 순서에 얽매여 직역하기 쉽다고 하셨어요. 고개를 들어 우리말로 옮겨야 글이 자연스럽다고 하셨지요선생님이니까 가능한 방식입니다. 선생님은 기억력이 정말 뛰어나거든요. 선생님이 구술하는 내용을 제가 키보드로 입력했지요. 저의 역할은 원서를 보면서 선생님이 빠트린 내용이나 내 생각과 좀 다른 부분이 있으면 의견을 내는 것이었어요. 당시 저는 학생들 중에서 우리말을 잘 한다는 평가를 들었어요. (통역대학원에서 영어보다 국어 실력으로 인정받는.) 그래서 조심스레 더 자연스러운 우리말 표현이 있으면 의견을 말씀드렸지요. 흔쾌히 받아들여주실 때도 있고요. “오케이 그 표현도 좋겠네.” 고개를 갸우뚱 하실 때도 있어요. “그건 너무 번역자의 의도가 들어간 해석이 아닐까? 저자의 의도에 대해 반역이 될 수도 있을 듯.”

선생님 옆에 앉아 PC 입력하는 작업은 아르바이트라기보다 귀한 공부였습니다. 1995년 당시 시간당 5만원의 일당을 받았는데, 하루 반나절 4~5시간 일을 하고 20만원에서 30만원을 받았지요. 당시 통역사 기본 수당이 시간당 5만원이었거든요. 생각해보면 하는 일에 비해 정말 많은 돈을 받은 셈이었어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번역의 속도가 빨라지고 (거의 동시통역하듯이 하시니까요.) 옆에 앉은 조수가 빠진 부분을 확인해주니 작업이 수월했던 거지요. 번역 일을 많이 하셔서 손목이나 어깨가 아파 고생하신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타자를 학생에게 맡기니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아 좋고요. 나중에 제가 직접 출판사에서 번역의뢰를 받아 해보고 알았어요. 선생님이 번역료의 상당액을 조수로 일하는 학생에게 주셨다는 것을. 선생님 옆에서 번역 수업을 11로 받으면서 돈까지 벌었으니 당시로선 최고의 꿀알바였습니다.

그 알바는 궁극적으로 제가 통역사란 직업을 그만두고 PD가 된 계기가 되었어요. ‘선생님이 말로 불러주면 타자를 치는 게 내 일인데, 언젠가는 저걸 대신하는 기계가 나오지 않을까?’ 스타트렉 같은 SF 영화를 보면 컴퓨터에게 말로 지시를 내리잖아요? ‘음성 인식 기술이 발달하면 이런 일자리는 사라지겠는데?’ 기계가 대신하기 힘든 직업을 찾다 PD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마존의 음성 비서 알렉사’, 한국에서 나온 기가지니누구등의 음성 비서 서비스 등을 보니 음성 인식 기술의 발달이 놀랍네요. 곧 비서의 역할을 인공지능이 대신하는 시대가 올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렸던 미래가 지금의 현실이 되었네요. 문득 이창희 선생님이 요즘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시리'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문서로 작업해줘. , 그리고 여기 원문에 나와 있는 핵융합기술에 대해 자료 검색 좀 해줘. 작업하는 동안 음악은 비틀즈 음반 애비 로드를 틀어주고. 안방 TV는 좀 꺼줄래?”

 

자동 번역 프로그램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이창희 선생님의 번역은 확실히 달라요. 알렉사 등의 인공지능 비서의 도움을 받는다면, 오래 일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장시간 앉아서 키보드 작업을 하다보면 디스크나 손목 염좌가 와서 힘들 때도 있는데요. 그걸 인공지능 비서에게 맡기면 되니까요. 저는 지금 이 문서를 쓰기위해 동네 도서관 디지털 자료실에 앉아 30분에 한 번씩 허리를 돌리고 손목을 털어주며 일하는데요. 앞으로 5년 후에는 좀 더 편안하게 일할 것을 상상해봅니다. 발리 쿠타 비치의 한적한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책을 읽다가 문득 시리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티스토리에 새 문서 작성으로 적어봐.’ 할 것 같아요. 타이핑은 인공지능에게 시키고 저는 생각을 소리 내어 말만 하는 거지요. <로봇의 부상>을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아요.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냉정한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밝은 희망을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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