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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어느 영어 덕후의 넋두리

by 김민식pd 2015. 12. 24.

드라마 피디가 영어 공부하는 법에 대해 글을 쓴다? 내가 봐도 이건 좀 웃긴다. 그런데, 나는 원래 이랬다. 대학 4학년 때는 상태가 더 심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말이나 90년대 초반에는 영어를 나처럼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들 '미제 타도' (미국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고 '양키 고 홈' (미군 철수)을 외치는데, 나는 혼자 AFKN (주한미군 방송)을 끼고 살았다. 내가 보기에 영어는 미군들이 쓰는 말이 아니라, 다가올 세계화 시대에 국제 공용어였다.

1980년대 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권력이동',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같은 책들이 화제였다. 다가올 21세기는 정보 혁명의 시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시장이 단일화되고 국가간의 교류가 더욱 확대된다. 국가간의 무역과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려면 영어가 필수겠구나, 그래서 영어를 공부했다. 남들 유학 간다고 TOEFL 공부할 때, 나는 TOEIC을 공부했다. 학술 영어는 미국 가서 박사를 딸 사람이나 필요한 거고, 앞으로는 비즈니스 영어가 각광받는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91년 한양대에서 본 토익에서 915점 받고 전교 1등을 했는데, 이건 내가 잘 했다기보다 다들 그만큼 토익을 안 봤다는 거다. 92년 졸업하면서 효성물산에 입사 지원했는데, 토익 성적서를 첨부했더니 접수하는 여직원이 떼내서 쓰레기통에 버리더라. "지정한 서류 외에는 받지 않습니다." 내가 그 점수 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무튼 그 시절은 좀 그랬다.  

다독하는 습관 덕에 운 좋게도 나는 세상의 흐름을 미리 읽을 수 있었다. 남들보다 먼저 영어를 공부한 덕에 능통하게 되었는데, 나 혼자 잘 하고 말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다른 친구들에게도 영어가 왜 중요한지, 영어를 독학으로 공부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줘야겠다. 그런 생각에 '영어 비법 특강'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웃기는 일이다. 당시 도서관 열람실 앞 게시판에는 이런 메모들이 붙어있었다.

'67번 자리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빕니다.'

'무석아, 리포트는 97번 현철이 자리에 갖다놨다.'

그 메모 옆에 나는 집에서 컴퓨터로 프린트한 전단지를 갖다 붙였다.

'영어 완전 정복! 독학으로 영어 공부하는 비법을 알려드립니다.

공학관 건물 105호 강의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대학 4학년생이 동년배 친구들을 모아놓고 빈 강의실에서 특강을 열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분야별로 나누어 4주에 걸쳐 영어 학습 방법을 강의했다. 정말 낯이 화끈거린다. 지가 뭐라고 그런 강의를 했는지... 첫 회에는 스무명 정도 학생들이 왔는데 그중 절반은 동아리 후배들이었다. 영어에 미친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왔을 거다. 특강에 대한 반응이 저조해서 갈수록 사람이 줄더라. 마지막에는 몇 명 안 왔다. 왜 그랬을까?

방법이 너무 어려웠던 거다. 듣기를 잘 하려면, 받아쓰기를 하고, 말하기를 잘 하려면, 문장 암기를 하라고 했더니, 다들 혀를 내두르고 그냥 갔다. 무슨 대단한 비법이 있는줄 알고 왔는데, 그냥 들입다 외우라는 소리를 하니, 실망하고 그냥 간 거다. 마지막 특강을 마치고 빈 강의실에 혼자 남아 절망했다. '앞으로 인생에는 이게 정말 필요할 텐데!' '지금 잘 해두면 나중에 큰 도움 될 텐데!' '처음에는 고생해도 나중에는 정말 영어가 재미있어지는데!' 왜 다들 이걸 몰라줄까...

덕후의 삶이 원래 그렇다. 1. 남들이 좋아하지 않을 때, 먼저 좋아한다. 2. 남들이 적당히 할 때, 혼자 미친듯이 한다. 3.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그 재미난 것을 남들에게 전파하려고 발악을 한다. 남들한테 안 먹히면 어떡하나? 그냥 혼자서 그 재미난 것을 계속 즐기면 된다. 그래서 바로 유럽으로 혼자 배낭여행 갔다. 이 재미난 것을.... 그래, 남들이 몰라주면 혼자 계속 즐기지 뭐.  

20대에는 의욕만 앞세웠다가 실패했다. 이제는 나이 50이니 새롭게 시도할 때다. 20대에 실패했으니 그만 둬야지, 그런건 덕후의 자세가 아니다. 될 때까지 해봐야지. 영어도 될 때까지 하면 다 된다. 하다가 마니까 안 되는 거지. 

대학 시절의 특강이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방법이 너무 어려웠다. 그 시절 나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명감(내게만 당연한!)에 너무 경도되어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영어이니, 힘들어도 해야지!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의 재미와 능률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망한 거다.

새롭게 영어 스쿨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고민 많이 했다. 어떻게하면 영어 공부 비법을 제대로 알릴 수 있을까?

대학 4학년 때, 나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자극했다. 이런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영어, 공부해야 합니다. 나도 겪어보지 않고 책에서 읽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했으니 얼마나 공허했을까. 이제 나는 늙을만큼 늙었다. ^^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 책에서 읽은 얘기보다, 살면서 겪은 내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 나에 대한 이야기로 영어 공부에 동기 부여를 해보자. 영어 공부 덕에 내가 얼마나 재미난 직업을 얻었는지, 영어 덕에 여행이 얼마나 즐거워졌는지, 영어 덕에 얼마나 멋진 부인을 얻었는지, 그런 걸로 글을 쓰자. (물론 마지막 글은 내려야했다. ^^)

 

이제 더 이상 나는 사람들에게 '영어 문장 받아쓰기'를 권하지 않는다. 들이는 공과 시간에 비해 효율이 떨어진다. 너무 힘든 공부 방법이다. '문장 암송'도 책 한 권을 무조건 줄줄이 외우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냥 소리내어 반복해서 읽기만 해도 된다. 직장인이나 주부의 경우, 시간을 내기 힘들면, 걸어다닐 때 MP3를 틀어서 책을 보지않고도 따라할 수 있을 정도만 하면 된다. (그래도, 대학생이라면, 방학 때 마음 먹고 꼭 한번 외워보시라. 하루 1시간만 투자해도 충분히 책 한 권 외울 수 있다.) 

영어를 잘하면 즐길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아진다. 인터넷에 올라온 많은 글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고, 재미난 유튜브 영상을 즐길 수 있고, 세계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영어 공부를 즐겼으면 좋겠다.

 

이제 곧 중급 영어 교실이 이어진다. 영어를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예정이다.

최근 본 유튜브 영상 한 편 올린다. 

 

 

일단 한번 보시라. 못 알아들어도 좌절하지 마시고. 코미디언들 대사는 나도 잘 못 알아듣는다. 한국 사람 중에도 개그 콘서트 보고 이해 못하는 사람 많다. 안 들리면 그냥 접고 회화 책을 외우는 게 낫다. 조금 들린다 싶으면 끝까지 보시라. 시간 여유가 있다면, 다 본 후, 다시 틀어보시라. 이번에는 설정에서 들어가 화면에 영어 자막을 띄우고 다시 보라. 틀린 자막이 많으니 감안 하시고. 절대 여러분 영어 탓이 아니다. 자막이 이상한거다. 다 본 후, 자막을 아래에 스크립트로 띄우고 한 줄 한 줄 이어가며 천천히 읽어보시라.

이 사람이 영어를 공부한 방식을 보라. 남아공에서 흑인 어머니와 스위스인 아버지(초콜렛을 좋아하는 ^^)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인종 차별 정책으로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한다. 미국에 가서 제대로 된 흑인 대접을 받으려고, 흑인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발음을 흉내낸다. 나중에 다시 만난 스위스인 아버지와 친해지려고 독일어를 공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엉뚱한 독일어 연설을 듣고 외우는 바람에... ㅋㅋㅋ

 

 

트레버 노아, 대단한 코미디언이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가지고, 이렇게 재미나게 풀 수 있다니...

 

먼 훗날, 나도 저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 제가 말이죠. 드라마 피디인데 말입니다. 2009년부터 3년 동안 '내조의 여왕'을 비롯해서 드라마 다섯 편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노조에 들어가 파업을 한 거예요. 파업 한 후로 3년 동안 딱 한 편 만들었어요. 그것도 야외 연출 B팀 감독으로. 그나마 그 일도 못하게 되었어요. 사람이요, 그러면 반 미칩니다. 자다가도 벌떡 벌떡 깹니다. 새벽 다섯시면 눈이 절로 떠져요. 잠이 안 와요. 가뜩이나 연출도 잘 못하는데, 못할수록 자꾸 해봐야 늘텐데. 이런 저런 걱정에 잠이 더 안 와요. 에라, 어차피 깼으니 그냥 일어나자. 일어난 김에 글이라도 쓰자. 그래서 키보드를 잡습니다. 그렇다고 회사 욕은 감히 못해요. 언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정부에 대해서도 감히 뭐라 그러지 못해요. 그랬다가 또 잡혀가거나 잘릴지 모르잖아요. 제가 또 겁이 많고 되게 소심하거든요. 뭐라도 글을 써야겠는데.... 뭘 쓸까 고민하다, 영어 공부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글을 쓴 거에요. 아, 설마 영어 공부하자는데, 종북좌파라고 잡아가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소심하고 찌질해요, 그래서.... 어쩌구 저쩌구...."  

 

진정한 코미디언은, 그런 거다.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아, 빨리 코미디가 더 늘어야할텐데....... 글 썼다가 내리고, 이러는 수준은 벗어나야할텐데....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없지만, 일단 한번 달리고 보는 거지,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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