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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영어 스쿨

방위병 시절 영어 공부의 추억

by 김민식pd 2015. 12. 2.
내가 다닌 울산 학성고등학교 옆에는 군부대가 하나 있었다. 지역 주둔 부대인지라 집에서 출퇴근하는 방위병도 많았는데, 그들은 오후 6시가 되면 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점호를 하고 퇴근하고는 했다. 현역 사병들이 축구한다고 연병장에서 쫓아내면 갈 곳이 없어진 방위들이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모인 것이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충성!" 경례를 하고 돌아가는 방위들을 보고 고등학생들이 손가락질하며 흉봤다. "똥방위다, 똥방위." 그때 지나가던 방위가 그랬다. "야, 너무 그러지 마라. 나도 너만할 때는 내가 방위될지 몰랐다." 그리고 3년 후, 나도 방위병이 되어 모교 옆 부대에 배치받았다. 아, 젠장......

어려서 책 읽는 걸 즐긴 탓인지, 시력이 나빠서 신체검사에서 3급을 받았다. 휴학하고 방위병으로 입소했다. 신병 훈련소에서 거울을 보니 어린 시절에 그렇게 흉보던 똥방위 하나가 서 있더라. 저게 나인가? 대학 다니는 2년 동안 연애 한번 못해봐서 훈련소 있는 동안 여학생에게서 위문 편지 한 장 안 날아오더라. 아, 젠장......

자대 배치받고 자기 소개를 시키기에 대학에서 자원공학과 다니다 왔다고 했더니 그게 무슨 과냐고 묻더라. 자원공학이라 하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 원래 이름은 광산학과라고, 석탄채굴공학, 석유채취공학, 암석역학을 배운다고 했더니 짖궂은 고참 하나가 넌 그럼 졸업하고 탄광 가냐고 묻더라. 그럴 생각은 없다고 했더니, 그럼 뭐 먹고 살거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더라. 멍하니 서 있는데 옆에 있던 고참 하나가 그랬다. "군대 짱박으면 되겠네. 직업군인 지원해라." 그랬더니 다른 고참이, "야, 저놈아는 방위잖아. 똥방위는 군대 짱박는 것도 안된다. 군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아까워서 도시락 싸서 출퇴근하라는 애한테." 그렇구나, 난 군대 말뚝도 못 박는구나... 아, 젠장........

방위병 신병이 내무반에 신고하러가면 현역 고참들이 조리돌림을 하는데 나는 그 와중에 진심으로 좌절했다. 왜냐하면 그 고참의 말이 폐부를 찔렀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하고 미팅 소개팅 도합 20번 연속으로 차였다. 입영 신체검사에도 떨어져 현역 입영도 못하는 약골에, 전공 학점은 2.0. 잘 하는 것은 커녕,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정말 비참하더라. 그래서 다짐했다. 내가 그렇게 못난 놈이 아니란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자. 어떻게? 남보다 잘하는 주특기 하나 만들자. 그때 떠오른게 영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외운 영어 교과서가 떠올랐다. 그래, 난 책 한권을 외우는 사람이었지.

그 길로 나는 부대 내 교회를 찾아가 말했다. "기독교 신앙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성경 한 권 얻을 수 있습니까?" 호, 이런 기특한 신병을 봤나. 흐뭇한 얼굴로 군종병이 문고판 성경을 주기에 다시 부탁했다. "기왕이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영한대역 성경으로 빌려주십시오." 그래서 영한대역 성경을 한권 얻었다. 그리고 작업하다 쉬는 시간에 남들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 피우는 동안 나는 한구석에 앉아 성경을 들여다보며 영어문장을 외웠다.

방위병 막내가 영어 공부한다고 토플책을 보다가 걸렸으면 직싸하게 맞았을 것이다. 이 자식이 군대를 뭘로 보고. 흔히들 군대 고참은 하느님보다 높다고 하지만, 고참들도 하느님 무서운 줄은 안다. 아무도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중얼거리고 있는 신병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어느 내무반에나 병장중에 독실한 크리스천이 있기 마련이기에 성경공부하는 방위를 함부로 구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하느님의 빽을 믿고 군대에서도 영어를 공부했다.

성경이 처음에 재미는 좀 없더라. 계속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이런 얘기만 나오고. 그리고 모르는 단어는 왜 그리 많은지. Thy name is... Thy will... 어쩌고 하는데 도대체 Thy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 이런 영어 단어가 있었나? 나중에 알고보니 You의 고어체 표현이었다. 그래도 방위병 근무하면서 영어 성경을 통독했다. 잠언 부분에는 좋은 영어 표현이 많더라. 우리가 대화중에 논어의 문장을 부지불식간에 인용하듯, 미국인들은 일상 대화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성경은 2000년 넘게 살아남은 텍스트다. 어떤 책이든 수천년의 세월을 견딘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진리를 담고있다는 뜻이다. 고전의 힘이 여기에 있다.

근무중 휴식 시간에 성경으로 영어 공부를 하다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시사영어사에서 나온 회화책을 보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표현도 입에 짝짝 달라붙고, 무엇보다 외우기가 정말 쉬웠다. 나긋나긋한 미국 여자 성우의 발음이 꿀처럼 귀에 솔솔 들어왔다. 그래서 방위병으로 근무하는 1년 반 동안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혀 영어만 공부했다. 지방이라 영어 학원도 없었고, AFKN도 안 나오고, 영어를 공부할 수단이 별로 없었다. 군대간 친구에게 빌려온 '미시간 액션 잉글리쉬'라는 회화책 하나만 죽어라 팠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급 영어를 공부하는 기간에는 이런 책 저런 책 다양하게 보고 이 학원 저 학원 기웃대는 것보다 오히려 딱 한권 정해놓고 통째로 외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학습법이다. 그래야 기초가 확실하게 머릿속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귀가 확 트이더라. 휴일에 극장에 가면 자막을 보지 않아도 헐리웃 배우들의 대사를 다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와, 신기하다. 그리고 문장을 하도 많이 외워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입에서 영어가 막 튀어나오더라. 이게 진짜 제대로 된 영어가 맞나? 그래서 복학하자마자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가 있다기에 신청해본거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 거기서 2등하고, 자신감을 완전히 얻었다.

지금도 내게 영어 공부의 원동력을 제공해주신 하느님께는 감사드리고 있다. 영어 공부, 하려고만 하면 어디나 길이 있다.
뜻이 없지, 길이 없으랴!

(엘 칼라파테의 페리토 모리노 빙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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