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현업 연출이 없을때 내가 하는 일은 외주기획안 심사다. 대본과 기획안을 읽고 편성을 할 건지 말건지 결정하는 일이다. 5명 정도의 드라마 평 PD들이 모여 심사를 하는데, 가끔은 서로의 의견이 갈릴 때가 있다. 나의 경우, 예능국에서 시트콤과 코미디쇼를 연출하다 왔기에 코믹한 대본을 선호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감독들은 드라마적인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대본을 나 혼자 찬성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드라마에서 진정성이 중요하냐, 웃기는 게 중요하냐? 여러 피디들과 내가 논쟁을 벌이면 사실 내가 불리해진다. '웃기면 되는거 아냐?'라고 무작정 우기기엔 역시... 그때, 어느 선배가 중재하고 나섰다. "내가 보기에 MBC 드라마국이 잘 되려면, 우린 무림처럼 가야 돼. 누구는 소림사 방주고, 누구는 사파 고수고, 누구는 검술의 달인이고... 다양성이 존재하고, 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야 하지. 그런 다양한 문파와 무술이 존재해야, 시청자들에게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MBC 드라마도 경쟁력을 갖게 되는거지."

역시! 고수의 한 마디에 중원의 혼돈은 평정되었다. 정답이 없는 곳이다. 서로의 취향이 다를 때, 다양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 난 나이 40에 드라마 PD가 되었다. 10년간 시트콤만 만들던 내가 드라마국으로 부서를 옮기며 했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4000만 시청자가 보는 MBC 드라마국에 나같은 사람도 하나 쯤 필요하지 않을까?' 

PD란 직업이 좋은 점이 여기 있다. 정답은 없다. 연출은 10인10색이라야 한다. 서로의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 드라마 PD는 저마다 무림 방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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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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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rdragonfly1234 2012.05.31 1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뭇~하시겠어요... 경지에 오르신 느낌이 납니다....

  2. 드라마PD가 되고싶어! 2018.04.12 1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PD님! 내일 면접을 앞두고 있는 드라마 PD 지망생입니다. 필기만 통과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면접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나를 가장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주변의 경쟁자는 다들 대단해보이기만 하고, 거기에 비해 나는 점점 초라해지는 것 같고.. 그런데 이 글을 보며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꼭 다 잘 할 필요는 없구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잘 어필하면 되겠구나. 너무 뒤늦은 댓글인 건 알지만 PD님의 글을 통해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게 돼서 감사의 마음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도 PD님처럼 남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