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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드라마 피디의 3가지 품성 (후편)

by 김민식pd 2014. 4. 22.

(지난번 글에서 이어집니다. 피디연합회에서 펴낸 책 <피디란 무엇인가>에 기고한 글입니다.)

드라마 피디에겐 3가지 품성이 필요합니다. 첫번째, 창의성, 두번째, 역량, 마지막으로 협업정신.  

두 번째, 역량이란 무엇인가. 지식, 기술, 태도의 합이다.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은 핸드폰에 검색 버튼을 누르면 언제 어디서나 튀어나온다. 머릿속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뛰어난 역량을 가진 걸로 쳐주지는 않는 시대다. 오죽하면 모 검색엔진 지식인의 절반이 초딩이라는 농담이 있겠는가. 아이나 어른이나 컴퓨터 검색 기술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지식은 보편적으로 접근가능한 시대다.

 

그럼 기술은 어떨까? 어렸을 때, 학원을 다니며 비싼 돈 주고 배운 기술이 두 개 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하나가 주산이고 또 하나가 서예학원의 펜글씨 쓰기다. 믿거나, 말거나, 주산을 배워야 취직이 쉽고, 글씨를 잘 써야 회사에서 승진이 용이하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주산과 펜글씨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처럼 요즘 시대에 지식과 기술은 필수 역량은 아니다. 오히려 급변하는 세상에서 지식과 기술보다 더 중요한 건 태도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그에 맞춰 적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태도. 지식은 학교에서 배우고, 기술은 직장에서 익힐 수 있지만, 태도는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핵심 역량이다.

 

몇 해 전 MBC PD 공채 논술 주제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강남역 2번 출구를 나왔다.’ 로 문장을 시작하여 이야기를 완성하시오.

 

위의 문제가 출제되었을 때, 문제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강남역에 한 번도 안가본 사람은 저 문제에 어떻게 답을 하라고? 내가 보기에 저 문제는 강남역 2번 출구에 대한 지식을 묻는 것도 아니고, 2번 출구를 나오는 기술적 방법에 대한 문제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황당한 논술 주제가 나왔을 때 응시자의 태도.

 

드라마 피디는 항상 예상외의 문제에 직면한다. 오토바이 소음, 공사장 소리는 점잖은 축에 속한다. 자정 무렵, 주택가에서 조명을 훤하게 켜놓고 촬영을 하고 있으면 마치 집어등을 보고 고기가 몰려들 듯 카메라 주변으로 취객들이 몰려든다. 그리고 그들이 꼭 찾는 사람이 있다.

당신들이 뭔데 남의 집 앞에서 길을 막고 촬영하는 거야? 여기 감독 누구야? 나와!”

이런 분들은 FD가 달려가서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리면 꼭 이렇게 소리 지른다.

당신이 감독이야? 감독 오라 그래!”

잠도 못자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밤 신을 마무리지어야할 피디의 입장에서는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취객 때문에 30분을 까먹는 건 정말 분통터질 일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생각을 바꿔본다. ‘저 분 입장에서는 자신의 동네에 와서 훤하게 조명 켜놓고 가는 사람 길 막고 촬영하는 우리가 민폐로 보일 수 있겠구나.’

 

드라마 찍기 편한 환경이란 결국 적막한 거리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세상이다. 길을 막고 차를 막고 심지어 거리 행상의 소리를 통제해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세상. 그렇게 활력 없고 생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결국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중요한 건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아닐까?

 

황당한 논술 주제가 나왔을 때, 출제자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시비를 걸어봤자 아까운 작문 시간만 까먹을 뿐이다. ‘역시 창의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 그런가, 작문 주제도 참 독창적으로 내네!’ 역량은 지식, 기술, 태도의 합인데, 그중에 으뜸은 좋은 태도다.

 

마지막으로 협동 정신. 협업의 중요성은 만화 슬램 덩크에서 배웠다. ‘슬램 덩크를 보면 서태웅이 윤대협을 찾아가 승부를 청하는 장면이 있다. ‘너나 나나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팀 내 에이스들이니, 1 1로 대결을 해서 이긴 사람을 전국 최고의 농구 선수라고 인정해주자.’ 그랬더니 윤대협이 만화 역사상 길이 남을 명대사를 날린다.

“11도 공격 기술 중 하나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는 너에게 지지 않아.”

 

서태웅은 천재이자, 팀 내 최고의 에이스다. 공이 오면 그는 절대 패스하지 않는다. 내가 최고인데, 풋내기 강백호 따위에게 공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윤대협은 농구가 11로 하는 경기가 아니라 55로 하는 팀플레이라고 말한다. 나 하나 뛰어난 기량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지만 팀 동료들이 자신의 역량을 100%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란다.

 

드라마를 연출하다보면 온갖 문제가 다 생기는데 나는 일하며 만나는 모든 문제를 감독이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늘이 나를 버릴 때는 동료가 내 곁에 있다. 화창한 날의 데이트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주룩 주룩 비가 퍼붓는 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료를 믿고 패스를 돌린다. 배우와 스태프를 모아놓고 회의를 여는 것이다. ‘이 장면 어떻게 찍을까?’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다보면 다양한 의견이 쏟아진다. 로케이션 섭외 담당자의 말.

새로 오픈한 쇼핑 몰이 있는데, 지하에 실내 공원을 꾸며둬서 가운데 분수도 있고 조각상도 있어서 그림이 괜찮거든요? 데이트 장소를 그리로 옮기면 어떨까요?”

좋은 의견이다 싶으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대본 수정을 상의한다. 우리가 하는 일에 오직 한 가지 답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캐스팅에서 촬영 콘티, 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답에는 대안이 있고 드라마 피디는 답이 없다고 느껴질 때 차선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답이 없다고 포기하고 방송을 접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다행인 것은 드라마 피디의 주변에는 항상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 잘 쓰는 작가, 연기 잘 하는 배우, 촬영 전문가인 카메라 감독,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은 전문가들과 함께 하는 공동 창작이자 협업인 것이다. 이들을 믿고 달린다면 하늘이 나를 버려도 기댈 구석은 있다.

 

우리 아이 미래형 인재로 키워라를 보니 알겠다. 드라마 피디로 즐겁게 사는 것도 미래형 인재의 3대 덕목에 달려있구나. 늦은 나이지만, 이제라도 창의성, 역량 (그중에 특히 태도), 협업 정신을 키워야겠다. 어떻게든 늦둥이 딸이 대학 갈 때까지는 현장에서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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