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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박제가의 '북학의'로 본 취준생의 자세

by 김민식pd 2014. 3. 25.

최근에 KBS PD 공채 발표가 났다. 아마도 몇몇은 합격의 감격에 기뻐하겠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크게 낙담하여 실망했을 것이다. 1000 대 1이라는 경쟁률이 말하는 건 무엇인가? 천명이 꿈을 꾸어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 단 한 명 뿐이라는 얘기다. 그럼 그 꿈이 제대로 된 꿈이라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그렇게 뽑힌 단 한명이 나머지 999명보다 더 나은 인재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뽑힌 분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이런 경우, 시험의 결과는 운이다.

 

얼마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고미숙 선생님의 감이당을 찾아갔다가 18세기 북학파의 삶과 책을 공부하는 중이다. 박제가의 북학의를 읽으며 청나라 수레나 벽돌, 기와에 대한 장문의 설명을 듣다 어느 대목에서 순간 무릎을 쳤다.

 

북학의 외편에 나오는 과거론이다... 

'과거란 무엇인가? 인재를 뽑기 위한 것이다. 인재를 뽑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그들을 쓰기 위한 것이다. 인재를 뽑을 때 문장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문장 솜씨를 이용하고자 해서이다. 

-중략-

시골의 고을에서 보이는 평범한 과시에도 답안을 바치는 자가 곧잘 천 명을 넘어서고, 서울의 대동과에서는 유생이 곧잘 수만명까지 이른다. (# 우왁! 수만명이란다! 세상에, 조선 시대 인구가 몇인데, 과거를 수만이 본다고? 실례를 보면, 정조 24년 1800년 3월에 치러진 경과정시에서 세 곳의 시험장에 입장한 사람이 111,838명이었고, 거두어들인 시권이 38,614장이었다. 11만명이 시험장에 갔단다... 세상에! 요즘 취업난 저리 가라다.) 수만 명이나 되는 많은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하므로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붓을 잡고 있기에 지쳐서 눈을 감은 채 답안을 내버린다. 사정이 이 지경이므로 아무리 한유가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소식이 문장을 짓는다 해도 (# 여기서 한유와 소식은 박제가가 숭배하는 대 문장가들) 번개같이 답안지를 넘길 테니 소식의 글솜씨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아! 당당한 선비를 선발하는 자리가 도리어 제비뽑기 놀이의 재수보다도 못한 형편이니 인재를 취하는 방법은 정말 믿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런 데다 또 문벌과 붕당을 따지는 차별의 문제가 끼어 있어 그로 인해 붙기도 떨어지기도 한다. 요행히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서 기용되는 자가 나온다면 그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 역시 200년전 초정 박제가 선생이 쓴 세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초정의 말대로 경쟁률이 높은 상황에서는 실력있는 사람을 뽑기가 참 어렵다. 공중파 PD 입사 경쟁률이 1000 대 1인데, 그 시험의 심사는 평소 업무에 찌들은 현업 피디들이 한다. 자신이 부릴 조연출을 뽑는 일이니 바쁘고 힘들더라도 직접 심사를 하는 수 밖에 없다. 문제는 피디도 사람이다보니 심사에 취향이 반영될 수 밖에 없고 체력적 한계로 인해 꼼꼼히 보기보다는 직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피디 시험의 결과는 운이라는 게다. (나만 봐도 그렇다. ^^ 그게 늘 죄송해서 이렇게 블로그질하는 거다. 운 좋게 먼저 들어갔으니 뭐라도 남기는 게 도리라는 생각에 공짜 PD 스쿨을 운영하는 거다.)

 

지원자가 너무 많은 상황에서 인재를 뽑으려면 어떻게 시험을 봐야할까? 박제가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인재를 얻고자 한다면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불시에 인재를 시험해야 한다.'

 

얼마전 피디 지망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누가 물었다.

"작년 MBC PD 필기시험을 보고, 완전히 멘붕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문제들이 나왔거든요. 혹시 출제 경향이 바뀐 건가요? 앞으로도 그런 문제들이 출제되나요?"

"필기 시험 문제가 많이 이상했나요?"

그자리의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럼 문제 출제를 참 잘 한 거네요."

?

"경쟁률이 높은 시험인데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출제를 하면 변별력이 떨어져서 실력을 검증할 수가 없습니다. 응시자 다수가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문제를 낸다면 그건 실패한 문제 출제지요. 저라면 앞으로도 예상하기 힘든 문제를 낼 겁니다."

 

평소 내 생각이 이러한데 마침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도 같은 생각을 만나 참으로 반가웠다. 누군가의 진짜 실력을 보기 위해서는 불시에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재능을 시험해야 한다. 자, 그렇다면 그런 시험의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피디 시험을 무슨 고시 공부하듯 준비하는 건 참 재미없는 노릇이다. 기출 문제 답안을 외우고, 논술 스터디 같은 재미없는 글쓰기로 시간을 때우며 이제나 저제나 방송사 공채 공고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삶, 이건 아니다. 피디는 전 국민을 상대로 놀아주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즐겁게 놀 줄 알아야 한다.

 

논술 스터디한다고 여럿이서 둘러앉아 예상 문제를 뽑고, 쓴 글을 크리틱하며 서로 상처만 주고 그럴 필요 뭐 있나.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 하나 정해서 그걸로 매일 블로그 포스팅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도 그만한 글쓰기 공부가 없는데. 머리 아프게 시사 상식 공부한다고 기출문제집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그냥 평소에 책을 즐겨 읽으면 된다. 그냥 읽는 정도가 아니라 미친듯이 한번 읽어보라. 1년에 한 200권 책을 읽으면 세상의 흐름이 절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출제 경향이 맞으면 운 좋게 합격해서 바쁜 직장인이 되는 거고, 재수없으면 그냥 삶의 여유로운 시간을 더 즐기며 사는 거고...

 

취업 시험의 당락은 운이 좌우한다. 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의 성공을 운으로 돌리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아직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운을 기다리며 인생을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하지 말고, 무조건 즐겁게 덕질을 하며 사시기 바란다. 그러다 파워블로거가 되고 다독가가 되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닌가. 거기에서 피디가 아닌 다른 길도 보일 것이다. 1000 대 1에서 한 명 만이 꿈을 이루기보다, 천 명 모두가 꿈을 이루는 방법, 그건 모두가 각자 즐거운 삶을 사는 것이다. 취업이라는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내 삶이라는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게 궁극적으로는 취업 관문 통과로 이어지는 결과가 아닐까?

 

항상 취업 관련해서 글을 쓰면서 마지막은 참 공허하게 느껴진다. 위로해드리고자 키보드를 잡았지만 역시 참 쉽지 않다. 죄송한 마음 뿐이다. 하지만 답은 즐기는 것 말고는 없다.

즐기시라, 부디!

 

 

열심히 18세기 사상가들의 책을 읽다보니 누가 그러더라. '나중에 사극 연출하려고?'

책을 읽을 때 무슨 목적이 있어 읽지는 않는다. 그냥 책을 읽는 그 순간이 즐거울 뿐이다.

요즘은 웬지 귀양살이하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삶이 많이 와 닿는다. 그래서 읽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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