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에서 이어집니다.)

 

2014/01/06 - [짠돌이 육아 일기] -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법

 

드라마 촬영할 때 가장 힘든 점은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많아 아이들 얼굴이 보고 싶어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와 큰 딸, 갓난아기 둘째딸을 촬영장에 오게 한 적이 있다. 모니터 뒤 감독 의자에 앉아 무릎에 딸을 앉히고 촬영을 진행했다. 나중에 쉬는 시간에 큰 딸 민지에게 물어봤다.

"아빠 일 하는 모습 보니까 어때?"

초등학교 2학년이던 민지가 말했다.

"신기해."

"뭐가 제일 신기해?"

"아빠가 말하면 사람들이 움직이고, 아빠 말 한 마디에 사람들이 멈추는게 재밌어."

내가 큐를 외치면,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모두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컷을 외치면 마법이 풀리듯이 동작을 멈추니 아이 눈에는 신기했을 법하다. 아이의 눈으로 보자면 모든 사람이 드라마 감독인 아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전에 서로 약속한 방식에 따라 모두 움직이는 것이다.

 

나의 드라마 연출은 항상 상대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촬영 시작 전에 배우와 대본 리딩을 하며 배우에게 물어본다. "이번 씬 어떻게 연기할까요?" 대사톤을 들어보고 좋으면 드라이 리허설을 해본다. 배우의 동선을 보고 좋으면 바로 카메라 감독에게 묻는다. "이번 씬 어떻게 찍을까요?" 의견을 들어보고 좋으면 바로 카메라 리허설을 해본다. 그러면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고 조명감독과 동시녹음 기사가 각자 장비를 세팅한다. 때로는 카메라 리허설 장면을 레코딩해서 배우에게 보여준다. 화면상에 어떻게 자신의 연기가 어떻게 나오는가 최종 확인을 한 후, 큐를 외친다. 이렇게 여러번에 걸쳐 서로 약속을 해뒀으니 슛 들어간 후, 엔지를 외치며 끊고 들어가 배우에게 연기 주문을 할 이유가 없다. 내게 있어 연출은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끊임없는 합의의 과정이다.

 

 

'내조의 여왕'을 연출할 때는 김남주씨와 오지호씨의 딸 역을 맡은 아이가 있었는데, 난 아역배우가 와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한다. 먼저 배우가 준비해온 대사톤을 들어본다. 내가 생각한 방향과 많이 다르면 내 의견을 말해주지만 가급적 배우의 자율적 판단을 믿고 따르는 편이다.

 

 

'자, 내가 아빠 오지호 대사를 해볼 게.' 하고 대본을 읽는다. 그럼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연기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와, 좋은데? 잘 준비했네. 이따가 카메라 앞에서도 그대로만 하면 되겠다!" 하고 칭찬해 준다.

 

배우가 촬영장 와서 대본을 외우면 그 촬영 망한 거다. 누구든 미리 완벽하게 준비해서 와야 하는데, 집에서 대사를 외우는 과정에서 사실 이미 톤은 입에 붙어버린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왔는데 갑자기 현장에서 연출이 그 톤을 뒤집으면 당황하여 나중에 연기가 어색해지기 쉽다.  피디가 일일이 동선, 호흡, 대사 톤 하나하나 다 지정하면, 다음부터는 배우는 미리 연습해오지 않는다. 그냥 백지 상태로 와서 피디 시키는 대로 하는게 스스로도 헷갈리지 않으니까. 이렇게 일하기 시작하면 피디가 정말 피곤해진다. 열명이 넘는 배우와 수십명에 달하는 스태프가 모두 연출 입만 바라보고 '쟤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지, 뭐. 지 뜻대로 안되면 무조건 NG내는 감독이니까.' 이러고 있다. 그런 현장에서 일하는 즐거움을 찾기란 어렵다.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로서의 자신감, 그리고 연출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자긍심이다. 그걸 키워주기 위해서는 연출이 배우가 준비한 연기를 믿고 맡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맡은 배역의 성격 연구도 열정적으로 하고, 연기하는 맛을 알아가는 진짜 배우가 된다.

 

고등학교 진로 특강에 가서 아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느라 자학 개그를 좀 한다.

"제가요, MBC 면접에 갔더니요, '김민식 씨, 고교 내신이 15등급에 7등급이네요. 왜 이리 공부를 안 하셨나요?' 그래요. 그래서 '사춘기 때 방황을 좀 했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대학교 전공 평점이 2.0 수준인데 그럼 대학교 성적은 왜 이리 나쁘지요?' 하더군요. 그래서 '사춘기가 좀 길었지요.' 했어요."

공부를 좀 못해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없다, 대학교 전공 대로 직업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얘기다. 어떤 애가 묻더라.

"공부를 못하셨다면서 어떻게 한양 공대를 가셨어요?"

여기엔 비밀이 있다. 3학년 1학기 모의고사 성적으로 반에서 22등이었는데, 학력고사 점수로는 반에서 2등이었다. 당시 학교에 '김민식이 컨닝했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고교 시절 성적이 나쁜 주 원인은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과를 다녔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기 싫은 의사를 목표로 공부하라니 의욕이 날 턱이 있나. 서울로 진학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막판 6개월 미친듯이 공부했다.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는 습관이다. 부모가 시켜서 하는 공부는 즐겁지가 않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아이들의 학습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바닥권이란다. 이 얼마나 불행한 나라인가. 가장 하기 싫은 공부를 가장 장시간 하는 나라.

 

서구 사회는 개인주의 전통이 강해 아이라해도 부모가 그 인생에 크게 참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어려서 삶의 의사결정을 직접 하는 버릇을 기른다. 스무살이면 바로 독립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는 나라, 비록 수학이나 과학의 교육 수준은 높지 않아도 아이들의 행복지수는 높다. 반면 유교 전통이 강한 한중일 3국에서는 부모의 말을 거스르는 것이 불효라하여 죄라는 인식이 크다. 그러니 자연 부모가 아이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하고 아이들의 교육에 열을 올린다. 서양에서는 자녀의 학업 성취도와 자신의 행복이 별개라 생각하여 쿨한 부모도 많은데 한국에는 유독 아이의 공부에 핫한 열정을 불태우는 부모가 많은 것도 문화 차이가 아닐지.

 

부모 시키는 대로만 사는 아이를 키우는게 육아의 목표인가? 피디가 시키는 대로 다하는 배우는 꼭두각시지, 참된 연기자가 아니다. 참된 육아란 독립심 강하고, 자기 성취 동기 강하고, 무엇보다 자긍심이 뛰어난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이의 선택을 믿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주도형 육아법,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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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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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오문 2014.01.07 08: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말씀은 생각을 바꾸게 해줍니다.
    제가 공부를 잘한 것을 아니었지만
    공부를 하는 게 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일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도 그렇게 되어주길 바라구요.

    자립심을 길러 주는 게 참 필요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저는 별개라는 사실을 잊지 말구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위에서 하나하나 지시하면 제 생각이 점점 없어지더라구요.

    오늘도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