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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짠돌이 육아 일기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법

by 김민식pd 2014. 1. 6.

나의 연출 데뷔작은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이다. 대학에서는 자원공학을 전공하며 석탄채굴학을 배웠고, 첫 직장에서는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치과에 세일즈를 다녔다. 나이 서른에 시트콤에 꽂혀서 피디가 되었는데 첫 연출작이 '뉴논스톱'이었다.

 

어떤 일을 맡았는데 그 일에 경험도 없고 지식도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일에 도전할까? 열정이다. 난 열정을 가지고 논스톱 연출에 임했다. 나의 목표는 당대의 톱스타, 정우성 같은 이를 시트콤에 캐스팅하는 것이었다. '왜 시트콤에는 늘 신인만 나올까, 스타 캐스팅을 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까?' 정우성을 섭외하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때 캐스팅의 달인이라는 어느 선배가 나를 불렀다.

"민식아, 너 요즘 시트콤에 정우성 캐스팅한다고 다닌다며?"

"네."

"그게 되겠냐?"

"선배님,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면 아주 불가능하기야 할까요?"

"민식아, 정우성 집 앞에 한번 가봐라. 너처럼 열정을 가진 피디가 열 명이 무릎 꿇고 앉아 줄 서 있을 거야. 넌 가면 줄 끝에 가서 서야돼. 열정만 갖고 되겠니? 그런데 말이야, 그 피디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지. 천하의 정우성도 5년 전, 10년 전, 영화 '비트'로 뜨기 전에는 무명의 신인이었다는 거. 방송사마다 프로필 들고 피디들 쫓아다녀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는 거. 민식아, 연출 초짜인 네가 해야 될 일은, 지금 톱스타인 정우성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5년 뒤, 10년 뒤, 제2의 정우성이 될 신인을 찾아서 키우는 일이란다."

 

그래서 100여명의 남자 신인 프로필을 뒤지고, 20명을 오디션 봐서, 1명의 신인을 뽑았는데 그게 조인성이었다.

 

 

스타와 신인의 차이는 NG에 대한 반응에서 온다. 신인의 경우, NG를 내면 주위 스태프들이 인상을 팍 쓴다. 가뜩이나 촬영 분량이 많아 걱정인데 초짜가 버벅거리면 '쟤 땜에 또 밤새겠네' 하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푹 나온다. 신인의 경우 NG를 내고 제일 먼저 눈 앞에 보이는 게 벌을 서는 한 남자다. 동시녹음의 경우, 마이크맨은 카메라 앵글 밖에서 음성을 픽업하기 위해 긴 장대같은 마이크를 양손에 잡고 팔을 치켜들고 서서 일한다. 감독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면 팔을 내리고 쉬지만, 엔지가 나면 계속 팔을 들고 있어야 한다. 이건 배우 입장에서 엄청난 압박이다. '저 사람은 나 때문에 벌서고 있구나.'

 

기죽은 배우는 이제 머리속이 하얘져서 다음 대사도 까먹기 일쑤다. 연기의 질은 리액션에서 나온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는 상대 배역이 대사하는 동안에는 상대방 연기에 집중하고 적절한 리액션으로 상대의 흥을 돋군다. 하지만 NG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배우는 머리속에서 자신의 다음 연기를 궁리하느라 표정이 따로 논다. 그러기에 긴장할수록 감독의 NG 소리와 호통은 더욱 늘어간다. 신인이 촬영장에 나와 망하는 전형적인 연쇄반응이다. 체인 리액션 Chain reaction을 막으려면 리액션 체인지 Reaction change를 해야 한다. 배우를 향한 반응을 바꿔줘야한다. 배우에게 기를 불어넣는 체인 리액션이 필요하다. 그걸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감독이다.   

 

스태프들은 자연 감독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신인이라고 감독이 막 대하면 자연 스태프도 인상 쓰게 된다. 피디가 배우를 귀하게 여겨야, 스태프도 배우를 아끼고, 그래야 시청자도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NG 후, 첫 반응이 중요하다.

 

2000년 당시 신인이던 조인성과 촬영 중, NG가 나면 나는 모니터 뒤에서 큰 소리로 배우의 주의를 끌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렇게 멋지고 잘생긴 친구가 심지어 엔지도 한번 안 내면 재수없어 정이 안 갈 텐데, 인간적 매력까지 배려해주시다니요!"

촬영장에 조인성이 나타나면 팬의 심정으로 달려나가 그의 멋진 자태를 칭송했다.

"야, 오늘 슈트빨 죽인다. 난 다음 생에 태어나면 조인성 코디가 되고 싶어. 이렇게 멋진 배우에게 이쁜 옷 마음껏 입혀보고 매일 매일이 얼마나 신나겠어?"

카메라 감독이 앵글 잡느라 조인성의 바스트샷을 잡으면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사내라면 저 정도는 생겨줘야하는 말이야. 도대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뭘하신 거냐고!"

조명 세팅을 기다리는 동안, 촬영장의 긴장을 푸는데 감독의 설레발만한 게 또 없다. '

"어제 방송 끝나고 게시판 반응 봤니? 조인성이 박경림에게 눈길만 한번 줘도 다들 쓰러지더만! 오늘 고백하는 장면 나가면 다 죽었어!"

 

피디로서 나는 항상 배우와 사랑에 빠진 시청자들을 직접 연기한다. 끊임없는 칭찬과 격려로 배우에게 상기시켜줘야한다. 그가 얼마나 멋진 친구인지를. 연출이 먼저 사랑해야, 그 사랑을 받은 배우가 신이 나 열연을 펼치고, 그걸 보고 다시 시청자가 사랑에 빠진다. 그런 점에서 피디는 시청자의 사랑을 대신 전하는 몸신이다.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가 되는 것은 피디가 되는 것과 같다. 나만의 스타를 키우는 일이다. 다만 한 자녀 가정의 경우, 데뷔작이 곧 은퇴작이라 부모 노릇은 그만큼 더 어렵다. 평생 초보 엄마로 살다 끝나는 것이다. 나는 마흔에 늦둥이 둘째를 낳은 후, 항상 주위에 둘째를 권한다. 아이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동생이기도 하지만, 초보 때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리턴 매치의 의미도 있다. 초보 부모는 초보 피디가 그랬듯이 열정을 가지고 작품을 대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부모의 열정이 아이에게 괴로움의 원천이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만큼 교육에 열정적인 분도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열정에 비해 내 성적이 너무 초라한게 문제였다. 고등학교 시절 내신 15등급에 7등급, 성적은 반에서 중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나의 성적과 당신의 목표 사이의 간극은 당신의 열정으로 메우셨다. 성적표만 나오면 매를 드는 열정... 아버지는 이런 무시무시한 멘트로 나를 기죽였다. "부모가 교육상 아이를 때리다 애가 잘못 되면 (죽으면...) 그건 죄가 아니다." (그 시절에 아동 학대란 말은 없었다.) 당시 맞다 맞다 진짜 맞아 죽을 것 같아서 도망간 적도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팬티 바람에 매를 맞았다. 홀딱 벗고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팬티 바람에 매를 맞으며 고민했다. 맞다 죽는 게 나을까, 쪽팔려 죽는 게 나을까? 맞다 죽자고 결정한 것 같다. 한번도 팬티 바람에 도망간 적은 없으니까.

   

작가가 되고 싶지, 의사는 죽어도 적성이 아닌데... 그럼에도 난 아버지의 고집으로 이과에 진학하고, 그 어려운 고등수학 2 문제를 풀어야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난 늘 죽을 상을 짓고 있었다. 남자 고교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냥하는 포식 동물이다. 무리 중에서 약한 놈은 정확하게 골라낸다. 그리고 그 한 놈만 죽을 때까지 쫓는다. 나는 그렇게 억센 경상도 남자 아이들의 밥이 되어 학교내 왕따가 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도 힘들지만, 맞고 집에 가면 아버지가 못난 놈이라고 혼내는 게 더 힘들었다. "너 그 놈 찾아가서 맞은거 두배로 갚고 와. 그러기 전에 저녁밥은 없어." 

 

집요한 따돌림의 대상이 되니 학교 가기 싫어지고 그러니 성적은 더 떨어졌다. 성적표가 나오면 아버지는 '너의 열정이 나의 열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건, 내 열정의 부족 탓인가보다' 하며 다시 열정적으로 매를 드셨다. 열정은 방향이 중요하다. 열정은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지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산다면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아이를 내몰면서 열정을 종용하는 것은 폭력이다. 아버지의 열정에 데어 나는 늘 기죽어 살았다. 그랬더니 학교에선 왕따요, 집안에선 구박데기가 되더라.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어야 하나?

 

제2의 정우성이라고 뽑았다면, 신인도 스타처럼 대접해야 하듯이, 바깥에서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집에서도 믿고 사랑해줘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해도, 여기 너를 믿고 사랑하는 1인이 있단다.' 하고 외치며 사는 것, 그것이 감독과 엄마의 일이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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