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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가족을 찾습니다

by 김민식pd 2013. 7. 22.

회사 선배가 어느날 부탁을 했어요. 저녁에 시간을 내줄수 있느냐고. 미국에 입양된 이들이 한국에 오는데, 한국인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게 일정 중에 있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한국 드라마 팬인데, 한번 만나볼 수 없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가족과 함께 먼 나라에서 온 손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저녁 내내 즐거웠어요. 막내 민서는 우리하고 똑같이 생겼지만 미국 사람이라는 킴벌리에게 신기해하며 애교를 떨었죠. 킴벌리와 만난 인연으로 우리 가족은 다음날 있었던 입양인들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 공연 초대장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지요.

 

18개월 아기 경희가 한국을 떠나던 날,
누군가는 눈물을 쏟았겠지요.
낯선 땅에 내린 아이도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래도 미국의 부모님은 좋은 분이었고 사랑을 주셨지요.
하지만 또 다른 비행기를 탔던 사내 아이는
어렵게 정붙인 새 부모에게 다시 버림을 받았습니다.
혹독한 기억을 안고 다른 생김새로 살아가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행복했건 불행했건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궁금했습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자랄 수 없었던 우리가 다시 한국을 찾습니다.
40년 만에 돌아가는 친구도 있습니다.
거리엔 모두 나처럼 생긴 사람들이겠지요.
한국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
거울을 보며 늘 궁금했던 질문이 한 번에 풀렸습니다.
어쩌면 이번엔 평생 품어 온 궁금증 해결될 수도 있을 겁니다.
친가족도 찾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나줄까요? 살아있을까요?
기대보다 앞서는 두려움.
그래도 꼭 알고 싶습니다.
내가 왜 이 나라를 떠나야 했는지.
대답이 될 단서를 한 조각이라도 더 찾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만나 이렇게 컸다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만약 내 앞에서 누군가 다시 눈물을 쏟는다면 괜찮다고 얘기하고도
싶습니다.
캘리포니아, 메릴랜드, 버몬트, 아칸소, 뉴저지, 미네소타에서
밤잠을 설치며 오랜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당신에게 해외 입양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한국 사람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게 된 나와 당신.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내게 어떤 기억을 남겼든
한국은 내 마음이 떠날 수 없는 나라이니까요.
열흘간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면서
여러분께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으려 합니다.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들고 서성이던 지난 날들.
그 조각에 맞는 그림이 조금이라도 이어질까 기대하면서요.
6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부디 시간 내셔서 우리를 만나러 와주십시오.
그리고 힘차게 손 내밀어 잡아주시길 바랍니다.

미주 한인입양인 올림

 

토요일에 보러 간 공연장 앞 로비에는 작은 전시회가 열렸어요. 입양인들이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찍은 사진이나 발견 당시 입고 있던 옷들이나 소지품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그런 소중한 추억의 물품을 전시하는 이유는 혹시나 친부모가 그걸 보고 자신들을 알아봐주지 않을까 하는거였어요. 킴벌리도 배냇저고리와 아기 시절 사진을 내놓았어요.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기던 킴벌리는 문득 진열 부스 앞에 서 있는 어느 할머니를 봤답니다. 그 할머니는 킴벌리의 아기 시절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진열된 배냇저고리를 가만히 어루만지더랍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킴벌리는 숨이 콱 막히고 떨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답니다. 그 할머니는 한동안 그 사진앞에 있다가 발을 옮겼고, 킴벌리는 가만히 바라만 볼 뿐 말 한마디 걸 수 없었답니다. 

 

'그냥 구경 온 할머니가 옛날 아기옷을 보고 신기해서 바라본 것 같아요.' 라고 말을 하지만, 그 순간 킴벌리가 얼마나 떨렸을 지는 알 것 같았습니다. 그때 느꼈어요. 정말 간절히 가족을 찾고 있구나. 

 

입양인의 공연 당시,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코너가 있었는데요. 

"어머니, 난 당신이 나를 버릴 당시 얼마나 힘들었을 지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알 수 있어요. 그러기에 아무런 원망도 없답니다. 저 자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아기를 포기할 당시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해할 수 있어요. 미움도 원망도 없고 이제는 그리움만 남았습니다. 어머니, 꼭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네, 킴벌리 역시 간절하게 바라고 있어요. 가족을 다시 만나기를. 여기 킴벌리의 자기소개를 올립니다. 혹시 주위에 1969년 10월, 기차에서 아기를 잃어버린 분이 있다면 한번 눈여겨봐주세요. 귀 수술을 여러번 받았다니 아기 때 청각 장애가 있었나봐요. 지금은 미국에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친부모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가 봐요. 혹시 주위에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잃은 가족이 있나 꼭 살펴봐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소개>

킴벌리 Kimberly Ferrell (지은희/F/46/1968515일생 unknown)

저는 킴벌리 패럴입니다. 저는 19691013, 부산행 기차에서 승무원이 발견해서 수원시청을 통해 앙카라 영아원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은희라는 제 한국이름과 196856일이라는 생년월일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앙카라 고아원에서 약 3년을 지냈고 19728월부터 입양이 될 때까지는 홀트 일산고아원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고아원에 있을 때, 귀 수술을 받았습니다. (입양)서류에는 성공적이지 못함이라고 적혀있는데, 태어날 때부터 고막이 없어서 귀에 가까이 대고 말을 하거나 큰소리로 얘기해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4살 반이 되던 19721229일에 미국에 입양되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뉴욕에 있는 공항으로 저를 데리러 왔고, 택시를 타고 호텔까지 갔던 기억이 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등과 눈으로 덮인 나무들을 보는 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입니다. 저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에서 두 오빠와 함께 자랐습니다. 저보다 25살 많은 큰 오빠는 제가 미국에 왔을 때 이미 결혼해서 아들이 있었고, 미국 내에서 입양된 둘째 오빠는 저보다 5살이 많습니다. 미국에 온 후 청각을 찾기 위해 저는 많은 검사를 받았고 수술도 했습니다. 수술을 6번이나 받고 오랫동안 언어치료도 했지만 지금도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이셨던 제 양어머니는 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고 하셨지만 곧 포기하시고 제 청력 상태를 고려해서 가르칠 수 있는 바이올린 선생님을 찾으셨습니다. 부모님의 노력과 음악 덕분에 저는 고등학교 시절 오케스트라와 학교 뮤지컬을 했고, 수영도 하면서 활동적으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스즈키 교육학과 유아교육을 전공한 후 지금은 스즈키 바이올린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98IT업계에서 일하는 R.데이빗 페럴과 결혼해서 지금은 딸 캐롤라인, 아들 매튜와 함께 버지니아주 헨리코에 살고 있는데, 집에 스튜디오를 꾸며 32명의 학생들에게 스즈키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음식, 문화, 역사, 음악 그리고 한국말 등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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