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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남자 나이 마흔이란

by 김민식pd 2013. 8. 17.

몇 해 전, 지금은 tvN 사장으로 계시는 송창의 선배님을 모시고 저녁을 먹을 때 일이다. 예능 피디의 대가로서 직장에선 선배요, 인생에서는 스승으로 모시는 송창의 선배님이 내게 물었다.

민식아, 너 올해 몇 살이니?”

이제 마흔입니다.”

송창의 선배님이 무릎을 치셨다.

, 정말 좋을 때다.”

난 선배님이 나를 놀리시는 줄 알았다.

에이, 나이 마흔이 뭐가 좋아요. 스물이 좋고, 서른이 좋죠.”

선배님이 정색을 하고 말하셨다.

남자 나이 스물은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는 나이고, 서른은 하고 싶어도 할 줄을 모르지. 마흔이 되어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일치하게 된단다.”

 

생각해보면 남자 나이 사십은 계절로 치면 요즘 같은 가을이다. 푸릇푸릇 꿈으로 가득한 봄 의 유년기, 뜨거운 열정으로 타오르는 여름의 청년기 다음에 찾아오는 수확의 계절, 가을이 바로 남자 나이 중년이다. 20대는 하고 일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기이고, 30대는 그렇게 찾은 일에서 전력질주 하는 시기라면, 40대는 여유를 갖고 내가 지닌 것을 누릴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했는데, 그때 한계령을 넘으며 인생에서 배워야 할 큰 가르침을 얻었다. 산 아래에서 설악산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고갯길이 굽이굽이 펼쳐져 저걸 무슨 수로 넘나?’ 했다. 설악산이나 동네 언덕이나 오르는 방법은 매한가지다. 오른 발 왼 발, 꾸준히 페달을 밟다보니 어느새 정상에 올라있다.

 

 

 

드라마 촬영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스케줄 표를 받으면 이걸 하루에 어떻게 다 찍나?’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럴 때는 그냥 첫 신만 생각하고, 그 중 가장 먼저 찍을 컷만 고민한다. 한 컷 한 컷, 꾸준히 찍다보면 16부작 미니시리즈든 50부작 대하사극이든 120부작 일일연속극이든 다 끝이 난다. 20대나 30대는 그렇게 살면 된다. 가고자 하는 목표가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그냥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면 된다. 그게 먼 길 가는 자세다.

 

그러나 자전거로 한계령을 오를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때는 정상에 오른 순간이다. 오르막에서는 사고가 나지 않는다. 넘어져도 살짝 다칠 뿐이니까. 그러나 내리막에서 스피드를 즐기느라 브레이크를 아끼면, 아차 하고 바로 큰 사고가 난다. 그래서 내려가는 길에서는 수시로 브레이크를 잡아 스스로 속도를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고생을 많이 할수록, 들인 공이 아까워 제동을 걸지 않는다. 잘 나간다고 방심하는 순간, 넘어져 크게 다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좋은 나이라고 하지만 나이 사십이 되니 예전만 못한 게 많다. 그 중 하나가 술이다. 20대에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는 접대로 날밤을 새고도 다음날 너끈히 출근할 수 있었는데, 마흔이 넘어가자 과음한 다음날이면 사무실에서 병든 닭처럼 비실거렸다. 그렇다고 불타는 금요일을 즐기고 가족과 함께 하는 소중한 주말을 날릴 수도 없고. 결국 난 마흔이 넘어 술, 담배, 커피 등을 끊기로 했다. 이젠 스스로 제어해야 할 나이니까.

 

요즘 주말이면 초등학생인 딸과 함께 한강에 자전거 타러 간다. 대학생 시절에는 한강에서 전력 질주를 즐겼는데 요즘은 딸 꽁무니를 쫓아가며 느긋이 경치를 즐긴다. 고속으로 달릴 때에는 작은 돌멩이 하나만 밟아도 바로 넘어지기에 바닥만 노려보며 달리지만, 느리게 갈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천천히 달리며 원경을 감상한다. 속도를 버리니 주위 경관을 즐기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느리게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 그게 생기는 나이가 40이고, 그래서 40이 좋은 나이인가 보다.

 

(월간 '앰블러' 9월호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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