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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웹툰 '미생'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by 김민식pd 2012. 11. 22.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책을 낸다고 했더니, 아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남편이 평소 자신의 짠돌이 철학을 담은 책을 낸답니다. 많이들 사 주세요.'

 

나름 '매스미디어 피디가 말하는 소셜미디어로 노는 법'이라고 말해줘도 마님에겐 별로 안 먹힌다. 마님에게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인생을 거저 먹으려는 짠돌이로 각인되어 있으니까.

 

드라마 피디로 먹고 살지만, 드라마 연출에 대해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그저 공짜로 배웠을 뿐이다. 특히 드라마 촬영 콘티에 대해서는 만화를 통해 배웠다. 컷 연출에 있어 최고의 교본은 슬램덩크다.

 

 

 

 

오른쪽 페이지

(우측 컷 : 윤대협의 원 풀샷, 서태웅 오버쇼울더) 엉...? 윤대협, 걸어오다 서태웅을 본다.

(좌상단: 윤대협 바스트) 여어...

(좌하단: 서태웅 바스트) 어이... 승부하자 

왼쪽 페이지

(우상단 세로 1: 하늘) 응? (여기서 하늘은 시간 경과, 장소 이동을 보여주는 인서트 컷이다.)

(우상단 세로 2: 길 가에 모여있는 아이들)

(좌상단 가로 1: 아이들 그룹샷) 뭐야, 우리 연습장에서... 우리도 농구하러 왔는데. 근데...

(좌상단 가로 2: 아이들 오버샷으로 시점) 저 사람들 프로 선수인가봐. 바보, 우리 나라에 프로가 어디있냐? 저 두 사람 누가 이길까?

(하단: 서태웅 웨스트샷) 공을 던지는 서태웅 모습

(하단 박스: 골대 타이트샷) 공이 들어가는 모습 인서트

 

잘 찍은 드라마를 보면, 버리는 컷이 없는데, 잘 그린 만화 역시 한 컷 한 컷, 그냥 넘어가는 컷이 없다. 만화에도 영상 문법이 있다는 걸 난 슬램덩크를 보고 배웠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는 풀샷 오버쇼울더로 둘의 위치를 보여주고, 대사와 리액션은 바스트 샷으로 처리한다. 빈 하늘 인서트로 장소 이동을 보여준 후, 길 가에 서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표정, 아이들의 시점으로 두 사람 모습, 서태웅의 플레이, 골대에 들어가는 공, 이렇게 하나하나 수렴해들어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의 시선을 이끄는 것, 이게 드라마 촬영 공식의 기본이다. 이 한 장만 봐도 드라마 촬영 콘티가 다 들어있다.

 

갑자기 웬 철지난 슬램덩크 얘기냐고? 요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즐겨듣는데,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조명가게의 강풀 작가가 출연했기에 환호를 질렀다. '와우, 이런 대박 게스트 캐스팅이 다 있나!' 두 만화가가 역대 최고의 만화로 꼽은 것이 슬램덩크다. 역시!

 

요즘 만화계 최고의 화제작이 웹툰 '미생'인데, 나는 요즘 창작자의 자세에 대해 '미생'에서 배운다.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뜻의 이 만화는 사실 자칫 '살아날 수 없었던' 아이디어였다. '이끼'의 성공 이후, 윤태호 작가가 바둑을 소재로 한 차기작을 준비중이라고 했을때 다들 말렸단다. 심지어 절친인 강풀 작가도 "형, 바둑 만화는 절대로 안돼. 하지마"라고 극구 반대했다. ''이끼'로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한 획을 그은 작가가 왜 생뚱맞게 바둑 만화를 하겠다는 거지?' 

 

자, 여기서 창작자로서 윤태호 작가의 자세가 돋보인다. 다들 안된다고 하니까 기가 죽는게 아니라 오히려 '곤조' 즉 근성이 살아나더란 것이다. 그래서 혼자 밀고 나가서 선보인게 지금의 미생이다. 역시 창작자는 근성이 살아있어야해!

 

드라마 피디의 기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그래야 첫째, 작업이 즐겁고, 둘째, 그 결과에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는 만화가가 부럽다.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으로 구현하는 것을 모두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화실 식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드라마 피디는 작가, 배우, 스탭, 방송사, 등 책임져야할 식구가 너무 많다. 그냥 '나 좋은 것만 할래.' 라고 이야기하면 웬지 무책임한 분위기? 그래서 나는 만화가 가진 소재의 다양성과 모험적인 시도를 부러워하고 좋아한다. 질투와 애정이 한데 섞인 시선?

 

 

 

올해 초, '미생'의 첫 화를 보고, 윤태호 작가에게 문자를 날렸다. '이 작품은 이끼에 이어 또 하나의 걸작이 될 조짐이 보입니다.'

 

착수 0을 보자. 동네에서 바둑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가 11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7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 7년의 세월을 작가는 바둑 알 하나, 그리고 부모님의 바스트 컷 2장으로 표현해낸다.

 

'7년이 지났다.

입단에 실패했다.

그때야 비로소 주름진 아버지가 보였고,

총기잃은 눈빛의 어머니가 보였다.'

 

첫 화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바둑이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는 만화로구나! 작가가 소재에 경도되면 안된다. '이렇게 멋진 바둑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겠어.'가 목표가 아니다. '바둑을 통해 그 속에도 인생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가 제대로 된 기획이다.

 

바둑 하나로 살아온 주인공이 모든 걸 빼앗기고 세상에 나간다. 정규 교육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살아온 그가 과연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인생도처 유청산'이라는데 '인생도처 유상수'다. 세상 어디에나 고수가 있어 언제나 연출을 배울 수 있는데, '미생'을 보면 연출론과 더불어 인생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공짜로! 

 

앞으로 웹툰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을 연재할 예정이다. 만화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캬아! 좋지 아니한가! 다음 시간에 앞서 피디스쿨 학생 여러분께 숙제를 내드린다.

웹툰 '미생'을 보고 오실 것~ ^^ (이런 숙제 내주는 학교 있으면 나오라 그래. ㅋㅋ)

 

'미생' 착수 0 보기...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5097

 

    

위의 슬램덩크 만화는 평소 협업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꼭 보여주는 장면이다. 못보신 분들은 아래의 포스트를 참고하실 것.

 

2012/11/15 - [공짜 PD 스쿨] - 협업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마지막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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