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은 어떤 삶일까요? 어려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안정된 삶을 사는 것, 그게 좋은 삶 아닐까요? 그런데요, 모두가 공부를 열심히 하니, 누구나 다 좋은 대학에 가기는 점점 힘들어져요. 아니 세상이 바뀌어서 좋은 대학을 나와도 좋은 직장에 가기 어려워졌어요. 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도 우리의 삶은 더 힘들어질까요?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일수록 더 불행해지는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일까요? 그 질문을 들여다보는 책이 있습니다.
<공부 망상> (엄기호, 하지현 글 / 녹스)
2015년에 나온 <공부 중독>을 통해 두 저자는 한국 사회가 공부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되었어요.
근대 사회에서 교육의 약속은 명확했습니다. 가난하더라도 재능이 있고 열심히 하면 교육을 통해 사회 이동을 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이 약속에 따라 한국의 많은 가족은 자신들이 가진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했어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은 능력주의가 말하는 ‘능력’의 의미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회였습니다. 능력이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총동원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능력주의는 한국에서 지나치게 성공한 이념이자 동시에 완전히 실패한 약속이 되었어요. 공부를 통한 사회 이동은 가능하지만, 반대로 교육이 점차 계급/계층 재생산의 수단이 된다는 것 자체가 능력주의가 너무 잘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능력은 개인의 재능과 노력만이 아니라 가족의 재력과 문화 자본, 그리고 인맥이라는 사회 자본까지 포함한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총량’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중산층 이하의 계층에게 한국은 신분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능력주의의 견고한 벽에 막힌 사회가 되어 가고 있어요.
반면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게 한국의 능력주의는 실패한 약속입니다. 의사와 변호사를 포함한 많은 전문직이 요즘 분노하고 있는 건, 자신들이 들인 노력에 비해 주어지는 보상이 적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보상을 비롯하여 노동 조건이나 사회적 존중과 인식 등 모든 면에서 박탈감을 느껴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능력주의의 수혜자이지만 정작 이들은 자신을 능력주의의 실패에 따른 피해자라고 인식합니다.
지금 20대 남성의 보수화를 주제로 한 논문들을 보면 한국에서는 하위층보다 중산층이 더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고 사회에 반발심이 커지고 있어요. 과거에는 공부를 해서 전문직이 되면 부모만큼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예전만큼 보상을 받을 가능성이 확연히 떨어져 있다 보니 중산층을 중심으로 피해의식이 굉장히 많이 확산되었습니다. 공부에 어마어마한 자본을 투여했는데, 기대한 아웃풋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줄어드는 것에 분노하지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언제 뺏길지 모른다고, 이미 뺏겼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10년 전 두 저자는 <공부 중독>에서 양극화된 두 그룹을 이야기했어요.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일찌감치 떨어져 나와 지적 교양과 사회적 상식 수준이 확연히 낮아진 사람들이 있어요.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가정에서도 사회화의 경험을 하지 못해서 감정 표현을 어려워하고 관계 맺기에도 서툴러요.
다른 한 그룹은 오직 공부 머리만 비대하게 키운 사람들입니다. 이 그룹은 주로 ‘공부한 다음에 놀아’ 같은 말을 들으면서 자랐어요. 무척이나 ‘바람직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나 이들 역시 사회화 경험을 하지 못했어요. 이들의 문제는 학창 시절에 잘 드러나지 않아요. 공부 잘한다고 칭찬만 받았겠지요.
사회화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채 또래 집단과 끝없이 경쟁만 하며 자란 사람들이 이제 중장년층이 되어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공부를 통해 경쟁에서 이기는 기술을 습득했고 그 결과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보상을 얻었어요. 하지만 공감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연대의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실패에 대한 내성이 약합니다. 정치 경제 분야 최상위에 있는 관료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보, 판검사가 내리는 국민적 상식에 들어맞지 않는 판정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이제 우리는 학교를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학교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에요. 사람을 만나고 사회성을 배우는 공간입니다. 저자들은 학교가 아이들에게 규율과 끈기를 배우게 하는 곳이자, 무엇보다 타인의 환대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가기 전에, 조금 더 안전한 공간에서 사람들과 부딪히고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이신 하지현 저자의 상담실을 찾는 청년들 가운데는 단기 아르바이트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밖에 나가 일을 하기보다 자기 방에 머물며 게임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게임 중독을 의심하고 병원을 찾지요. 실제로는 게임 중독이 아니라 그저 방 밖의 세계가 너무 어렵고 두렵기 때문이라고요. 방 밖에서는 노력해야 하고, 실패할 수도 있고, 몸과 마음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방 안은 익숙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가장 편안한 곳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는 말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고, 사회에 기여하며,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믿었지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직업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일은 일을 하는 시간에만 존재하고, 삶의 즐거움은 일 이후의 시간에서 찾습니다. 퇴근 후 취미 생활, 여행, 소비, 취향 활동. 요즘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대부분 여가와 소비에서 찾습니다. 이제 청소년들에게 “너는 커서 무엇을 하고 싶니?”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대학은 점수에 맞춰 가는 곳이 되었고, 직업은 취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일의 의미를 새롭게 찾고, 일과 삶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게 중요합니다. 좋은 일이 좋은 삶을 만듭니다. 여기서 좋은 일은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아니라, 내가 할 때 즐거운 직업입니다. 성장이 있고, 배움이 있는 일.

우리는 왜 공부할까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공부 망상>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공부가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라면, 우리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 아마도 답은 단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공부가 시험 점수나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공부의 의미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지요. 그리고 어쩌면 그때, 공부는 다시 조금 즐거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퇴직 후, 저는 도서관을 찾아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세상을 공부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 공부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는 나이는 중년 이후의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독서를 통해 공부의 즐거움을 누리고요. 다음 세대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시 공부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면 다행이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지금 세대가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너무 많은 공부를 하느라 지치고 피폐해진 다음 세대를 보며, 우리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공부의 즐거움을 다시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다시 책을 읽으며 공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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