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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지적 폐활량을 키우자

by 김민식pd 2025. 2. 17.

저는 좋아하는 저자를 만나면 그가 쓴 책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다작하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책을 많이 쓴 분에게 한번 빠지면 그가 쓴 수십 권의 책을 읽느라 행복한 책벌레의 삶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거든요. 요즘 제가 반한 저자는 우치다 다쓰루 (혹은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제가 일하면서 느낀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시거든요. 

책을 워낙 많이 쓰셨는데요. (1년에 열권 넘게 내신답니다. 그중 한국에는 소수의 책이 번역되어 들어옵니다.) 이분의 책이 한국에 많이 소개될 수 있었던 건 번역가이자 학자이신 박동섭 선생님 덕분입니다. 박선생님이 우치다에 빠져서 저서를 한국에 소개하고 있거든요. 

<무지의 즐거움>(우치다 다쓰루/박동섭/유유)이란 책이 나왔어요. 그간 한국에 소개된 선생의 책은 모두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해 펴낸 것이었지만, 이 책은 박동섭 선생님이 기획하여 우치다 선생에게 질문을 던지고 선생께서는 한국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답을 하셨습니다. 즉 우치다 선생이 내신 수많은 책 중에서 이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는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고, 제가 읽기에도 제일 재밌었습니다.


우치다 선생은 전방위 지식전문가입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깊이 있는 답을 해주시거든요. 콘텐츠가 넘치는 요즘 세상에서 지식과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부로 삼아야 할지, 읽고 쓰는 능력의 기초는 어떻게 다져야 하는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영어 공부 과열 현상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등등. 

박동섭님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요즘 젊은 세대 대다수가 글 읽기, 특히 긴 글 읽기를 어려워한다고 하는데, 이런 읽기·쓰기를 돕는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여기에 우치다 선생님은 ‘지적 폐활량’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수영을 할 때 폐활량이 적은 사람은 물 속에 오래 있을 수가 없기에 자꾸 올라와야 합니다. 폐활량은 물속에서 숨을 참고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입니다. 책을 읽을 때 모르는 대목이 나오면 우리는 답답합니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 같지요. 지적 폐활량이 풍부하면 모르는 상태에서 참고 견디며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옵니다. ‘아, 이런 이야기구나!’

1990년대 영어를 독학하던 시절, 저는 스티븐 킹의 소설을 꼬리를 물고 원서로 읽었습니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니, 처음에는 모르는 단어도 많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전을 뒤지거나 하지 않아요. 그냥 아는 단어와 내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밀고 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어려운 단어의 뜻을 문맥을 통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아, 미국 사람들은 이 단어를 이렇게 쓰는구나! 물론 이런 독서가 가능한 것은 제가 스티븐 킹을 믿기 때문이지요. 워낙 대중소설을 쓰는 이라, 문체가 그리 난해하지 않고 재미난 이야기의 전개가 펼쳐진다는 믿음을 제게 주거든요. 

‘그런데 이 ‘폐활량’이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글을 읽다가 이내 한숨 돌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요. 모르는 채 계속 읽기는 고통이므로 읽고 있는 책 내용 가운데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찾아서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것만 ‘골라서 집어 먹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쓰여 있다고, 자신이 골라 이해한 대로 책을 간단히 요약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알지 못했던 것, 읽고도 알지 못한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리죠.’

사람들의 문해력이 왜 떨어질까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숱한 텍스트를 접합니다. 입력할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많을 때, 우리는 취사선택을 합니다. 굳이 이해하기 어렵고 정서적으로 불편한 글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쉽고 재미난 글 위주로 읽습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그런 글들만 계속 보여지고요. 이제 사람들은 불편한 글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글을 걸러버리거든요.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책보다 미디어가 더 재미난 시대가 가져오는 비극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는 가치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미지의 것에 대해 경의도 호기심도 사라지게 되고요. 이런 경향이 젊은 세대의 지배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으면 그건 집단의 지적 능력 쇠퇴로 이어질 거라고 우치다 선생은 염려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앎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활동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독서입니다. 텍스트를 온라인으로만 소비하면 ‘무지의 즐거움’을 즐길 수 없습니다. 온라인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쓴 글만 읽고, 웃고 즐기고 분노하고 우울해하면 우물안에 빠져 돌림노래만 계속 듣는 격입니다. 물론 저도 사회적 관계망에 올라온 글을 열심히 읽습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책 리뷰나 저자들의 신간 소개를 통해 읽고 싶은 책을 찾거든요. 온라인 글 읽기와 독서가 함께 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치다 선생은 카프카를 읽다가 “너와 세계와의 싸움에서 세계를 밀어줘라”라는 말을 만난 적이 있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지요. 보통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생기면 일단 이해하려고 노력하지요.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생겼을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급기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해 버립니다. 음모론이 그렇습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너무 쉬운 설명을 가져다 씁니다. “응, 그건 외계인이 한 짓이야.”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예 잊어버림으로써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즉 나는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방어기제야말로 좋지 않지요.

‘과학적 지성은 자신의 가설이 들어맞는 사례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설이 들어맞지 않는 반증 사례를 찾는 것에 우선으로 지적 자원을 할애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설을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만들고, ‘진리에 더 가까운 것’으로 고쳐 쓸 찬스를 늘려 주기 때문입니다. 타인으로부터 “당신의 가설은 틀렸습니다”라는 반증을 제시받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가설을 고쳐 쓸 수 있도록 반증 사례를 찾는 것, 그것이 과학자의 영광입니다.’ 

우치다 선생의 머릿속에는 선생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 있던 것이 가득하답니다. 그러다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아! 이게 그건가?!” 하며 무릎을 치게 되는 때가 찾아옵니다.

제가 요즘 여행과 독서를 번갈아 합니다. 이를테면 저는 2023년 2월에 쿠바 여행을 다니며 내내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쿠바 여행이 무척 낭만적이라 좋았다고 했는데 내 마음속 이 불편함은 무엇일까? 이상적인 사회주의 체제는 왜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걸까? 그러다 작년에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을 읽고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폐쇄적인 정치 제도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불러 일으킨다는 걸 깨달았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걸 머릿속 어딘가에 쟁여둡니다. 그러다 책을 읽다 문득 의문이 풀리기도 합니다. 독서와 여행은 선순환의 관계입니다.

‘너와 세계와의 싸움에서 세계를 밀어주라’는 말은 내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힘들어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오늘도 책에서 배울 수 있어 행복한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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