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에 뉴욕 여행을 갔어요. 스마트폰이니 구글 지도가 없던 시절입니다. 맨하탄에서 전철을 타고 자리에 앉아 지도를 펼쳤어요. ‘그래서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지?’ 그때 제 옆자리에 있던 인자한 미국 할머니가 그랬어요. “여행 오셨나요?” “네.” “뉴욕 지하철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로 보이면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공개된 자리에서 지도를 보는 건 위험한 일이랍니다.”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도 조심하면서 다녔어요. 20년이 지났지만 뉴욕의 지하철 분위기는 여전히 삭막하더라고요.
서울에서 살면서 치안이 이렇게 좋은 곳도 참 드물다고 느껴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깜짝 놀라는 일들이 있습니다. 커피숍에서 스마트폰으로 자리를 맡아둡니다. 빈 테이블에 휴대 전화 하나 올려져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카페에서 공부하던 이가 노트북을 열어놓은 채로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고요. 서로를 믿는 것을 사회적 신뢰 자본이라고 하는데요. 신뢰 자본이 풍부한 나라가 선진국이랍니다.
<눈 떠보니 선진국> (박태웅 / 한빛비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서울대 김병연 교수에 따르면 한 사회의 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이 10% 올라가면 GDP가 0.8%나 올라간다고 한다. 2020년 추정 GDP가 1,898조193억 원이니까, 0.8%면 15조쯤이 된다.’
신뢰 자본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열차표 검표입니다. 어느 순간 서울역에 검표원이 사라졌어요. 개찰구는 그냥 열려 있습니다. 원래는 검표원이 개찰구에서 손님들이 내미는 기차표에 펀칭기로 구멍을 냈거든요. 열차 출발 시간에 맞춰 문이 열리고 줄을 지어 들어가다 짐을 내려놓고 기차표를 꺼냈던 기억이 있는데요. 요즘은 그냥 아무 때나 빈손으로 쓱 들어갑니다. 시간도 단축되고 여러모로 편리해졌어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에 신뢰 자본이 쌓였고요, 다른 하나는 IT 기술입니다. 지금도 검표원은 있어요. 이분들 손에 있는 작은 단말기가 현재 객차에서 안 팔린 좌석이 어딘지를 알려줍니다. 검표원은 그곳에 앉은 사람에게만 조용히 표를 요구합니다. 검표는 하지 않는 대신, 무임승차를 하다 걸리면 10배에서 30배의 벌금을 물립니다. 타는 건 자유지만 무임승차를 하다 걸리면 호되게 벌금을 내요.
예전의 시스템이 몇 명의 무임승차자를 잡기 위해 모든 승객을 불편하게 했다면, 새 방식은 대부분의 승객을 아주 편하게 하는 대신에, 잡힌 무임승차자에게는 높은 비용을 치르게 합니다. 전수 검표를 하느라 생기던 개찰구의 길게 늘어선 줄도, 개찰하는 데 들던 시간과 인건비도 비할 바 없이 줄었어요.
이걸 사회 전반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사회 각분야에서 비용을 발생시키는 온갖 행정규제를 줄이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래서 공무원들의 민원 업무를 증가시키는 불필요한 일들을 줄이는 거죠. 신뢰를 악용하고 예산을 남용하는 사례가 나오면 사후 징벌을 세게 때리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선하다라고 일단 믿고요. 그렇지 않다고 판명이 된 사람에 대해서는 세게 응징을 하는 거죠. 이렇게 규제를 없애면 우선 창의성이 증대됩니다.
1996년과 2006년 사이에 한국영화가 느닷없는 황금기를 맞습니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97년 〈넘버3〉 〈접속〉 〈초록물고기〉, 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JSA)〉 〈박하사탕〉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1년 〈소름〉,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2004년 〈송환〉, 2006년 〈괴물〉 등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 할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게다가 이들 극영화 15편 가운데 무려 8편이 감독 데뷔작이었어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로 봉준호 감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고, 같은 해 박찬욱 감독은 세 번째 연출작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96년도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해에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습니다. 사전 검열이 폐지됐고, 공연윤리위원회도 사라졌어요. 한국영화가 아카데미를 수상하고 한국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는 건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가능한 거죠.
잘 나가는 기업도 이제는 사전 규율보다 자율성을 더 중시합니다. 예전 조직이 군대처럼 엄격한 계층구조로 이뤄졌다면, 현대의 조직은 작은 팀들이 높은 자유도를 가지고 활발하게 협업을 하는 쪽을 지향합니다.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최고의 IT 회사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해요. 어떤 업무지시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실험을 하고, 사내 협업툴에 자신이 기획한 프로젝트를 올려 자원자를 구합니다. 누구보다 빨리 실패하고, 누구보다 많이 실패함으로써 우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고요. 그 과실을 모두 함께 나눕니다. 요즘처럼 기술의 발전이 너무 빨라 앞날을 정확히 예측하는 게 어려운 시대일수록 조직의 자유도가 중요해집니다.
몇 해 전 국내 유수의 음식 배달 서비스 회사에서 한국의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정리해 자사의 서비스를 쓰는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거죠. 막상 연구 결과가 나온 뒤 이 업체는 발표를 하지 못하고 접었습니다. 비밀을 발견하긴 했는데, 전혀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만하지가 않았던 겁니다.
‘이 연구결과는 오래된 맛집의 비밀로, 압도적인 단 하나의 변수를 가리켰다. ‘자가 점포’. 자기 점포에서 영업을 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맛집들이 장사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원조’ 경리단길의 경우, 2013년부터 개성 넘치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가게들, 특히 당시로선 드물던 수제맥줏집들이 자리 잡으며 ‘핫플레이스’로 부상했어요. 외지 손님이 몰려들고 임대료가 치솟으면서 상권 형성에 기여한 점주들이 가겟세를 감당하지 못해 가게 문을 닫아야 했지요. 임차인이 갖은 노력을 다해서 입소문을 내고, 그래서 손님이 늘어나고 매상이 올라가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을 건물주들이 냉큼 임대료로 가져가 버립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래도록 성공하는 가게가 나오기 힘들지요.
일본 여행을 다녀보면 골목마다 오래된 가게가 있어요. 이들이 살아남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임대차보호법에 해당하는 게 일본의 차지차가법借地借家法입니다. 임차인이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고 있거나, 임차 기간 중 건물에 손상을 입혔다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건물주는 임대 연장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법으로 못을 박았고요. 주변 비슷한 건물의 임대료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은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임대료를 올리지도 못합니다. 건물주와 임차인 간에 분쟁이 있으면 재판으로 해결해야 하며, 주변의 임대료가 많이 올랐다는 것도 건물주가 입증해야 합니다. 이런 구조라면 식당 주인이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할 만하지요. 노력의 대가를 고스란히 자신이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열심히 한 결과로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니까요.
‘남의 땅에 건물을 올리지 마라.’ 그렇죠. 남의 땅에 아무리 좋은 건물을 지어도 그건 내 건물이 아니라는 거니까요. 그런 점에서 회사 생활도 비슷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회사를 나가는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평생 남의 땅에 건물을 올린 격입니다.
은퇴 후의 인생 이모작은 자가점포를 갖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 땅에 내 가게를 올릴 수 있어요. 직장인으로 일하는 동안 회사는 월급을 미끼로 내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월세로 받아갑니다. 월급은 좋지만 그로 인해 희생하는 게 많아요. 퇴사하면 나의 시간은 오롯이 나의 것입니다. MBC 피디로 일할 때, 회사에서 일을 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지금 저는 하고 싶은 일은 마음껏 시도해봅니다. 저는 나 자신에게 100% 재량권을 줍니다. 그렇게 시도하는 다양한 일로 소득을 올리고 여가를 즐깁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완전한 자율성이나 무한한 신뢰를 누리기는 쉽지 않죠. 언젠가 퇴사한다면, 나에게 100% 자율성을 선물하세요. 그 자율성을 바탕으로 내 땅에 건물을 열심히 지어보는 겁니다. <눈 떠보니 선진국>,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제언’이라는 부제를 단 책인데요. 이 책을 읽으며 저는 노후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았어요.
24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활용할 때, 어떻게 시간의 생산성을 증대할 것인가? 앞으로는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서 나눠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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