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시간관리를 주제로 책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클럽장이 쓰는 발제문을 공유합니다.)
도서관 강연을 가면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피디님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인가요?” 인생을 바꾼 단 한 권의 책을 고르기란 참 어렵습니다. 저는 수많은 책을 읽고 그 책에서 나온 조언을 꾸준히 삶에 적용하며 살아왔으니까요. 그래도 딱 하나만 고르라면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뽑겠습니다. 스무 살에 이 책을 읽고 제 인생은 바뀌었거든요.
알렉산드르 류비셰프는 1890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과학자입니다.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공인 곤충분류학과 해부학은 물론 생물학, 유전학, 진화론, 철학, 역사학 등에 걸쳐 방대한 저서를 남긴 분인데요. 철저한 시간 관리와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기능의 최대치를 사용하고자 했답니다. 그 결과 70여 권의 학술 서적을 냈지요. 이 책에는 류비셰프가 어떻게 시간을 활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류비셰프가 남긴 일기장이 소개되는데요. 1916년부터 1972년까지 똑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었다고요.
1964년 4월 7일, 울리야노프스크
곤충분류학 : 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두 점 그림. 3시간 15분
어떤 곤충인지 조사함 – 20분
추가 업무 : 슬라바에게 편지 – 2시간 45분
사교 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 2시간 25분
휴식 : 이고르에게 편지 – 10분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지 – 10분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 - 1시간 25분
이건 일기가 아니라 시간 통계입니다. 류비셰프는 매일 아침 24시간씩 입금되는 시간을 어떻게 썼는지, 마치 가계부를 쓰듯 시간의 금전출납부를 기록합니다. 이 책을 보고 경도되어 저는 20대에 시간의 가계부를 썼어요. 그 덕분에 시간의 생산성이 올라갔지요. 대학 시절, 저는 영어 공부에 빠져서 살았어요.
시간 통계를 내고 내 삶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다 영어 공부로 돌렸습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음악을 들었다면 이제는 영어 회화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갑니다. 음악감상 마이너스 30분이 회화 공부 플러스 30분으로 바뀌지요. 저녁 먹고 TV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머리를 식혔다면 이제는 미국 시트콤을 봅니다. TV 시청 마이너스 30분이 회화 청취 플러스 30분으로 바뀐 거죠.
‘류비셰프는 ‘자투리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매우 세세한 계획을 세웠다. 예를 들어 여행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가벼운 책을 읽거나 외국어 학습을 했다. 영어도 ‘자투리 시간’을 통해서 독학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혼자서 영어를 공부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런 점에서 류비셰프는 저의 은인입니다. 내가 몰랐던 인생의 가능성을 알려주었거든요. 심지어 저는 다독하는 습관도 류비셰프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참으로 다양한 책을 엄청나게 읽었어요.
‘먼저 아침에는 머리가 맑기 때문에 철학이나 수학 분야처럼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책들을 읽는다. 약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읽고 나면 조금 읽기 쉬운 역사나 생물학 방면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머리가 피곤해지면 가벼운 소설류를 본다.’
그러니까 류비셰프는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버리기 싫었던 겁니다. '책을 읽다 지치면 쉰다', 가 아니라 '더 가벼운 책을 읽는다', 가 그의 선택인 거죠. 요즘 제가 외국어를 공부하는 방법도 비슷합니다. 아침에는 우선 회화책을 펼쳐놓고 소리 내어 암송을 합니다. 점심 먹고 졸린다 싶을 땐 ‘듀오링고’ 앱을 열어 게임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일본어 단어 공부를 합니다. 저녁 먹고 쉴 때는 넷플릭스에 들어가 제가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봅니다. 이때 처음 보는 작품보다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보는 작품이 많습니다. 반복 시청할 때 회화 청취에 더 집중할 수 있거든요. 문장 암기 / 단어 공부/ 회화 청취를 시간대 별로 나누어 합니다. 그러면 지치지 않고, 질리지 않고 계속할 수 있어요. (아, 물론 이건 제가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는 은퇴자니까 가능한 루틴입니다. 학생이나 직장인은 이렇게 하기 힘듭니다.)
책 37쪽에 보면 제가 스무 살에 이 책에서 처음 접했던 단어가 나옵니다. ‘딜레탕트’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온갖 것에 관심을 가진 딜레탕트이다. 딜레탕트의 어원은 즐긴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딜레토 dilletto’이다. 다시 말해 딜레탕트는 연구하고 일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이다.’
어려서 저는 책읽고 글쓰는 걸 좋아해서 문과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강권으로 이과에 갔고요. 결국 성적이 모자라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대학 입학하고 무척 불행했습니다. 어느날, 영문과 수업을 청강했어요. 내가 너무 너무 공부하고 싶었던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작 영문과 학생들은 별로 재미없어 하더라고요. 영작 숙제가 나오면 다들 괴로워하고요. 순간 깨달았어요. 어떤 일을 전공하느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끼는가, 아닌가로구나. 전공이 아니어도 어떤 일을 즐길 수 있다고 느꼈어요. 그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 류비셰프였어요. 그는 정말로 다양한 취미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그 결과 많은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거든요.
딜레탕트는 취미파 학자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요. 딜레탕트가 되는 것이 제 삶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영어 공부도 취미삼아 시작했다가 통역사라는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고요. 시트콤 시청을 취미삼아 하다 시트콤 연출이라는 직업을 얻었습니다. 평생 책을 읽다 이제는 저자가 되었고요. 무엇 하나 전공으로 제대로 배운 건 없지만, 재미 삼아 하다보니 취미가 직업이 되더군요. 비결이 무엇일까요?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의 생산성을 키워, 더 많은 시간, 집중하는 시간을 투입하면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게 제가 류비셰프에게 배운 '시간 통계'가 준 선물입니다.
피디로 일하면서도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책을 읽었어요. 피디로 일하면서 10년 넘게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한 편씩 올리기도 했고요. 회사 후배들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어요. “형은 도대체 시간이 어디서 나요?” 언젠가 류비셰프는 도무지 생각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한탄하는 젊고 유능한 학자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학자,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학자는 학자로서 아무런 가망도 없습니다.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꾸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다면 학문의 길을 아예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세상이 시킨 일만 하고 살기보다, 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이 하라는 일을 때로는 그만두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합니다. 이를테면 동창회에 나오라고 연락이 와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봅니다. 세상이 내게 벌을 줄 때가 있습니다. 2012년 회사에서 정직 6개월의 징계를 받았을 때가 그렇지요. 당시 저는 회사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 동안 방송 일 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독서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어려서 저는 류비셰프라는 낯선 이름의 과학자의 삶을 다룬 책을 읽고 3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하루 24시간을 일당을 받은 것처럼 소중하게 쓰자.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있다면 마이너스의 시간을 플러스의 시간으로 바꿔보자.
둘째, 자투리 시간만 잘 활용해도 인생의 경계를 넓힐 수 있다. 짬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글을 쓰자.
셋째, 딜레탕트가 되자.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일하는 시간을 행복한 시간으로 바꾸자.
저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류비셰프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께 3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 여러분은 이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셨나요? 일요일에 오시면 여러분의 감상을 들려주세요.
2. 이 책에서 제일 좋았던 대목은 무엇인가요? 각자 세 구절씩 골라주세요. 세 문장도 좋고, 세 문단도 좋습니다. 모임에서 소리 내어 읽고 그 글이 좋았던 이유를 나누어주세요.
3. 책을 읽고 딱 한가지만 내 삶에서 적용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트레바리에서 시간관리를 주제로 4회 모임을 하는데요. 첫번째 시간에는 저의 20대를 바꿔준 책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소개했습니다. 트레바리 모임은 20명 정원으로 마감되었습니다. 하지만 발제문과 제가 쓰는 글들을 계속 공유할테니, 여러분도 저와 함께 독서 모임을 한다는 생각으로 4개월 동안 시간관리에 대한 책을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책을 통해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 모두 시간의 주인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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