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수능 마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다닙니다.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봅니다.)
여러분, 수능 보느라 고생많았어요. 지난 십여년 동안 주위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거에요. "네가 나이 스물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다니느냐로 네 남은 인생이 결정난다."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대학 전공과 인생은 별 상관이 없어요. 저는 대학에서 석탄채굴학과 석유시추공학을 공부했지만, 서른살에는 동시통역사 출신 예능 피디가 되었고, 마흔살에는 드라마 피디가 되고, 쉰살에는 작가가 되었어요.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요. 우리는 100세까지 살아요. 나이 스물에 어느 대학을 다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30대나 40대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에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대학 전공에 맞춰 재미없는 일을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거든요. 오히려 저는 지금부터 10년이 여러분 인생의 분기점이라고 생각해요. 여기가 종점이 아니라 시작점인 거죠.
인공지능의 시대에요. 갈수록 사라지는 직업도 많고, 새로 생겨나는 일도 많을 거에요. 대학 전공과 상관없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날 거에요. 수능은 잔인한 시험이에요. 모든 과목을 골고루 다 잘해야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어요. 잘하는 과목보다 못하는 과목에 집중해야 평균 점수가 올라가요. 못하는 일을 더 잘하려고 하는 건 스트레스가 많아요. 대신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집중하면 삶이 더 즐거워요. 스무 살 이후의 인생이 그래요. 이제부터 여러분은 좋아하고 잘하는 일, 딱 하나만 해도 됩니다.
스무 살에 저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1지망 산업공학과에 떨어졌거든요. 지금은 그때 입시 실패가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원하지 않는 2지망에 합격한 탓에 저는 진로를 찾아 헤맬 수 있었고요. 영업사원, 통역사, 예능 피디 등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나의 천직을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대학 전공에 흥미가 없어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웠어요. 강의실보다 도서관이 더 좋았거든요. 어느 날 깨달았어요. 아,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 즐거운 사람이구나. 책을 읽다 여행의 즐거움에 눈을 뜨고, (책을 읽다보면 가고 싶은 곳이 늘어나요.) 연애의 즐거움에도 눈을 떴어요. (책을 많이 읽으니 자존감이 올라가고요, 내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요.)
지금 이순간, 대학 입시의 결과가 좋지 않아 마음이 괴롭다면 여러분에게 찾아올 유혹이 하나 있어요. 나의 괴로움에 대해 남탓을 하자는 유혹이지요. 내가 이번 입시를 망친 건, 엄마 탓이야, 선생님 탓이야,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야. 그런데요, 남탓을 하면 내 인생은 바뀌지 않아요. 남탓하지 말아요.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사는 거예요.
대학교 1학년 때, 자전거를 타다 큰 사고가 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내 얼굴을 자세히 보면 열다섯 바늘 정도 흉터가 있는데, 그때 상처에요. 내리막에서 스피드를 즐기다 커브길에 바퀴가 밀려서 넘어졌어요.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어요. 아스팔트에 얼굴을 들이받아 피투성이가 된 거죠. 한쪽 눈 실명한 줄 알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눈두덩이의 찢어진 살점이 눈을 가렸던 거죠. (큰일날뻔 했어요. 그때...)
한쪽 눈도 안 보이고, 뇌진탕의 충격으로 주저앉아있는데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냥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내 발로 가까운 병원을 찾아갔어요. 로비에 들어가 응급실이 어딨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멀찍이 서서 손가락으로만 가리키더군요. 혹 피가 묻을까봐... 그때 깨달았어요. '세상에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스무살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얻은 값진 인생 교훈이에요.
살면서 시련이 오면 그때를 떠올립니다. 죽을만큼 괴로운 일이 생기면 그때를 생각해요.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라고 각오를 다집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을 때, 누가 도와주겠거니 하고 바라면 안 돼요. 도와주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으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요. 원망과 분노는 좌절로 이어집니다. 타인의 도움을 기다리지 말고 혼자 힘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피디로 일하며 힘들 때가 많았어요. 시청률이 안나와 조기종영 당한 적도 있고요. 회사에서 이런저런 힘든 일을 겪은 적도 있어요. 그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시청자 게시판에는 연출을 조롱하는 글이 올라오고요. 나 때문에 제작사도 어려워지고, 작가도 어려워지고, 스탭들까지 고생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일을 못해서 그런 건데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어요. 힘들 때마다 조용히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어요.
올해 대학 입시에서 가고 싶은 곳에 가지 못해 괴로운 친구도 있을 거예요. 미안한 말이지만, 그렇게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러분은 이제부터 성인이거든요. 혼자 힘으로 일어나는 연습을 해야 해요. 인생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이에요. 주위 둘러보지 말고, 그냥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세요. 어떤 고난과 시련이 와도, 나는 혼자서 이겨낼 수 있다, 라는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제 대학 입시가 끝났으니 취업 준비를 시작하겠다는 장한 결심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그러지 마세요. 어차피 먹고 사는 고민은 100세 시대, 평생 해야 하는 숙제에요. 그러지 말고 일단은 좀 놀았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놀아보세요. 친구랑 놀아도 좋고요, 혼자 놀아도 좋아요. 저는 혼자 노는 걸 선호합니다. 나 자신의 욕망에 좀 더 충실할 수 있거든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진정 즐거운 사람이에요. 혼자 있는 시간이 견디기 어려우면, 타인에게 의존하고, 그러면 더 외로워져요.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더불어 살 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가장 부자에요. 시간 부자. 인생에서 돈보다 더 소중한 자산은 시간이거든요.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을 귀하게 여기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여러분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학교 생활 12년 동안 남이 시키는 일을 하고 살았다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정도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으며 살아도 좋습니다. 기나긴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그 시간이 최고의 투자입니다.
대학 입시 치르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여러분.
일단은 좀 쉬면서 즐기시어요.
(고3 수험생들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몇년 전 MBC를 명퇴하면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에요. 세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50대 중년의 각오가 그러했고요. 그런 생각이 <외로움 수업>이라는 책으로 이어졌지요. 인생, 혼자 가는 거에요. 외롭지만, 괴롭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외로움이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한 주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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