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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음식으로 풀어본 경제학 이야기

by 김민식pd 2023. 10. 16.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이자 베스트셀러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저자 장하준 교수님이 새 책을 내셨습니다.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18가지 재료와 음식으로 가난과 부, 성장과 몰락, 자유와 보호, 공정과 불평등, 제조업과 서비스업, 민영화와 국영화, 규제 철폐와 제한 등 우리에게 밀접한 경제 현안들을 재미난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 글, 김희정 옮김, 부키출판사)

경제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스템입니다. “자유 시장의 자유에 맡겨 두면 경제가 저절로 발전할까?” “사람들이 가난한 건 게으르기 때문일까?” “기회의 평등만 보장하면 공정한 세상이 만들어질까?” “자동화가 우리의 일자리를 모두 빼앗아 갈까?” “이제 제조업은 끝났고 서비스업이 대세라는 주장은 옳을까?” 제가 평소 궁금해하던 주제에 대해 경제학자께서 속 시원하게 답을 해주십니다.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요. 그가 독일을 넘어 전세계에 미친 영향이 있습니다. 그는 근대국가 최초로 복지 국가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복지 국가라고 하면 ‘진보’ 정치 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복지 국가를 처음 만든 건 극보수의 대명사인 비스마르크였습니다.

1871년까지 수십 개의 영토로 갈라져 있던 독일을 통일한 직후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를 산업 재해에서 보호하는 보험 제도를 도입합니다. 이게 노동자를 위한 세계 최초의 공공 보험이고요. 1883년에는 공공 의료 보험, 1889년에는 공공 연금을 제정합니다. 두 제도 모두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어요.

요즈음 복지 국가를 지지하는 사람은 곧잘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데요. 비스마르크는 이름난 반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을 인생의 큰 충격들, 이를테면 산업 재해, 질병, 노령, 실업 등에서 보호하지 못하면 그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리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복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복지 국가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대비해 시민 모두가 공동 구매하는 사회 보장 상품입니다. 공동 구매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요? 소비자 가격이 내려갑니다.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려면 부자나라 중 보편적 공공 의료 보험 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인 미국과 다른 부자 나라들의 의료 비용을 비교해 보면 됩니다.

GDP 비율로 볼 때 미국인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적어도 40퍼센트 이상, 많으면 2.5배 정도를 의료비에 더 많이 씁니다. 미국의 의료비 지출은 GDP 대비 17퍼센트인데 반해 아일랜드는 6.8퍼센트, 스위스는 12퍼센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 최악입니다. 즉 공공 의료 보험이 없는 미국은 의료 시스템에 더 많은 돈을 쓰고도 국민 건강 상태는 더 나쁜 거죠. 미국 평균 기대 수명은 76세로, 84세인 우리나라보다 한참 낮습니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어서 공동 구매를 통해 얻는 혜택을 보지 못합니다. 국가 전체 시스템을 통한 ‘대량 구입’ 디스카운트를 받는 대신 모든 병원은 개별적으로 약과 의료 장비를 구입해야 하고, 의료 보험 회사들은 이윤 추구 기업이므로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합니다.

의료 보험은 중요한 국가 복지 시스템입니다. 복지 제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혜택을 주는 제도라고 오해하는 분이 있는데요. 복지 혜택은 전혀 공짜가 아닙니다. 모두가 비용을 부담하는 노령, 실업 같은 ‘사회 보장 분담금’에 더해 대부분의 사람이 내는 소득세와 간접세가 복지 제도의 재원으로 활용되기 때문이지요.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지만, 일반 시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보장해 주는 것이 정치적 안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알았던 겁니다.


1960년대 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이 2023년에는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세계 10위의 장수국가입니다. 우리는 잘 살고 오래 사는 나라가 되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국이 유독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는 걸 보고 근면, 절약, 교육을 강조하는 유교 문화 덕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요. 과연 그럴까요? 

1960년대 초 한국의 총저축률은 GDP의 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이고 뭐고를 떠나서 한국인은 너무 가난해서 저축할 돈이 없었어요. 그 후 30여 년에 걸쳐 한국의 저축률, 특히 가계 저축률이 극적으로 증가합니다. 사실 농업 사회에 적합한 유교 문화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이 기간에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가계 저축률이 증가한 것은 한국 경제가 너무 빨리 발전해서 사람들의 소비가 수입의 증가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정부는 주택 담보 대출과 소비자 금융을 엄격히 제한해서 제조업체들을 위한 대출 기회를 극대화했어요. 한국에서 집이나 자동차, 냉장고 등 비싼 물건을 사려면 먼저 돈을 모아야만 했습니다.

1990년대 초 GDP의 22퍼센트, 당시 세계 최고의 저축률을 보였던 한국은 1990년대 말 정부가 이런 제한들을 철폐한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 3~5퍼센트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한국의 GDP 대비 가계 저축률은 5퍼센트로 칠레(10.5퍼센트)나 멕시코(11.4퍼센트) 등 이른바 ‘돈을 헤프게 쓴다’고 알려진 중남미 국가들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가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난한 나라 중 많은 수가 열대 지방에 위치하고, 열대 지방에는 천혜의 자원이 풍부해서 쉽게 먹고살 수 있어서 근로의욕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열대 지방에 많이 모여 있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근로 윤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일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 연령 인구 중 일하는 사람의 비율이 부자 나라보다 훨씬 높습니다. 세계은행에서 201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제 활동 참가율은 탄자니아 83퍼센트, 베트남 77퍼센트, 자메이카 67퍼센트인 데 반해 독일은 60퍼센트, 미국은 61퍼센트, 심지어 워커홀릭이라고 알려진 한국조차 63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데 왜 가난할까요? 문제는 생산성이 높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생산성이 낮은 것은 교육 수준, 건강 등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나 조건과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이민 온 사람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이민을 왔다고 갑자기 없던 기술이 생기거나 건강이 급격히 더 좋아지는 것이 아닌데 생산성은 올라갑니다. 그들의 생산성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은 전기, 교통, 인터넷 같은 양질의 사회 기반 시설과 더 잘 기능하는 사회적 체제를 기반으로 해서 더 잘 운영되는 생산 시설에서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당나귀를 타고 애를 쓰던 기수가 갑자기 좋은 혈통의 경주마를 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기수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누가 경주에서 이기는가는 많은 부분 기수가 탄 말이 결정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왜 덜 생산적인 테크놀로지와 사회 체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낮은 생산성밖에 달성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간단하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식민주의 역사의 잔재, 만성적 정치 분열, 엘리트 계층의 무능력, 부자 나라에 유리하도록 편성된 국제 경제 체제 등 굵직한 이유들도 일부에 불과하니까요.

분명한 것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ㆍ정치적ㆍ기술적 문제 때문이고, 개인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열심히 일할 마음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가난한 나라의 빈곤의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상위 계층인 글로벌 엘리트들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빈곤의 책임을 돌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가난에 대해서는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경제학은 우리 삶에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경제학 이론이 세금, 복지 지출, 금리, 노동 시장 규제 등의 정부 정책에 영향을 주고, 이런 정책은 우리 일자리와 노동 환경, 임금,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상환금에 영향을 줍니다. 한 시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경제학 이론은 동시대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줍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음식과 경제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을 읽고 세상을 공부하는 것 또한 좋은 삶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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