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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무서운 이야기, 좋아하시나요?

by 김민식pd 2023. 10. 13.

지난 여름, 유럽 기차 여행을 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열차 타는 걸 참 좋아합니다. 책 읽기 가장 좋은 공간이거든요. 집에 있으면 수시로 나의 집중력은 다른 사물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열차 안이라면? 내 앞에 있는 책과 창밖의 풍경만을 오가며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을 지내야 합니다. 여행은 실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열차를 기다리고,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고, 동이 트기를 기다립니다. 자투리 시간이 날 때 저는 재미난 소설을 읽습니다. 집중해서 공부하듯 읽는 책과 달리 맛있는 간식 느낌의 책이요. 유럽 여행을 하며 크레마 북클럽에서 찾아 읽은 책이 있어요. 

<흑백> (미야베 미유키 / 북스피어)

책에는 오치카라는 아가씨가 나옵니다. 소꿉친구이기도 한 요시스케와 약혼을 했다가 약혼자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정혼자를 오치카의 눈 앞에서 살해한 범인은 어릴 때부터 오치카와 한 지붕 아래에서 남매처럼 친하게 살아온 남자에요. 그는 자신을 비웃는 연적을 해치고 곧 자신의 목숨도 끊습니다.

질투와 실의와 상심이 일으킨 비극이지요. 오치카는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어요. 고향에서는 고개를 들고 살 수 없을 것 같아 다른 도시로 갑니다. 마침 숙부와 숙모가 이 사연 많은 아가씨를 맞이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과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럴 때 시련으로부터 달아나는 첫 번째 방법은 공간의 이동입니다. 자신의 미모 때문에 목숨을 잃은 정혼자는 동네 이웃이에요. 그 집 부모는 며느리가 될 뻔했다가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그녀를 볼 때마다 죽은 아들이 떠오르겠지요. 그 역시 죽은 정혼자의 부모와 마주칠 때마다 죄책감이 일 거고요. 이럴 때 답은 먼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숙부의 가게는 인기가 많아 일손이 부족한 곳이에요. 그곳에 가서 오치카는 하녀처럼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숙부에게 부탁합니다. 미모의 소녀가 웃음기 없이 말없이 일만 하는 모습은 곧 동네에 소문이 납니다. 사연 많은 아가씨가 왔나 보다 싶지요. 사람은 몸을 움직이고 있노라면 잡생각을 잊습니다. 시련으로부터 달아나는 두 번째 방법은 무언가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겁니다. 저는 힘들 때마다 새로운 외국어 공부를 하든, 서울 둘레길 공부를 하든, 몸을 쓰는 일을 합니다. 회사 가기 힘들 때는 자전거를 타고 회사로 가요. 한강 자전거길을 달리며 페달을 밟는 순간만은 즐겁거든요. 그렇게 내게 찾아온 시련으로부터 마음의 거리를 두는 거지요. 새로운 일에 집중할 때, 고민은 줄어듭니다.

고맙게도 오치카의 숙부와 숙모도 오치카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아이구, 다 지나간 일인데 뭘 아직도 그걸 붙들고 사니.” 이런 이야기하지 않아요. 사람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누가 저렇게 말한다고 낫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종기를 건드리듯이 너무 조심스럽게 대하지도 않아요. 고생을 많이 해서 세상 물정에 훤한 부부는 그래 봤자 부질없을 뿐이며, 처음부터 통하지 않을 줄 알기 때문이지요.

부부는 오치카가 하녀로 일하도록 배려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오치카의 괴로운 과거를 캐고 싶어 하는 입이 험한 어린 하녀들은 내보내고, 경험 많은 고참 하녀 오시마만을 남겨 두어 오치카가 마음껏 바쁘게 지낼 수 있는 무대까지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약 그런 흉사가 있었을 때, 정혼자의 뒤를 쫓는다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앓아누웠다면, 하나의 비극이 또다른 비극으로 이어지는 셈입니다. 시련이 닥쳤다고 해서 죽는다면 사람의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겁니다. 오치카에게 일어난 일은 엄청난 불행이지만, 불행한 걸로 따지자면 세상에는 훨씬 더 가혹한 일도 있어요.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그걸 믿고 그냥 묵묵히 일하도록 둡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숙부가 출타한 날 손님이 찾아와요. 숙부 대신 인사를 하려고 손님 앞에 나서는데요. 손님에게서 특별한 이야기를 하나 듣게 됩니다. 슬프고 무섭고, 또 기이하고 신기한 이야기를요.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작은 아버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연이다.’ 그가 친하게 지내 온 바둑 친구가, 얼굴을 처음 마주한 오치카에게 오랫동안 몰래 숨겨 왔던 옛 상처를 보여 주고 이야기했다는 것. 조카딸에게는 위로나 격려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형태로 세상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숙부는 물건을 파는 상인으로 한번 결정하면 행동이 빠르고, 수배도 잘합니다. 당장 단골 직업소개꾼을 불러,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가 에도 전역에서 신기한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을 여기저기에 내 달라고 부탁합니다. ‘비밀은 단단히 지키겠습니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만 넣어 두었던 일을 남몰래 이야기하고 싶은 분은 부디 미시마야를 찾아 주십시오’하고.

이렇게 해서 한 번에 한 사람씩,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괴담 자리가 시작되고요. 미시마야 시리즈가 탄생합니다. 저는 유럽 여행을 하며 1권 <흑백> 2권 <안주> 3권 <피리술사> 4권 <삼귀> 5권 <금빛눈의 고양이>까지 읽고요. 지금 베트남 여행을 하며 6권 <눈물점>을 읽고 있어요. 



정말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산신과 인간 소년의 우정, 무너져 가는 빈 저택을 홀로 지키는 요괴 구로스케의 이야기, 한 마을을 파멸로 몰고 간 남자의 무서운 원한, 가까이 다가오면 반드시 사랑하는 남녀를 헤어지게 만든다는 연못, 앞일을 예고하는 능력을 가진 산장, 사람이 감추고 있는 악행을 꿰뚫어 보는 아이, 등등. 

어찌 보면 연작 소설이고 어떻게 보면 괴담 모음집인데요.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엄청난 시련을 겪고 상처를 입은 오치카의 성장담으로서의 이야기도 매력적이고요. 네, 힘든 일이 있을 때 달아나는 세 번째 방법은 재미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저 역시 그랬어요. 여행 중 지치거나 힘들 때 마다 재미난 이야기 책을 펼쳤으니까요. 

내게 시련을 주는 공간에서 달아나거나, 새로운 일에 몰입하거나, 재미난 이야기를 듣거나.

셋 중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가장 쉬운 건 세번째입니다.   

미시마야 시리즈, 너무 무섭지만은 않으니까요. 한번 접해보시어요. 소설 읽는 새로운 재미를 만나실 겁니다. 어느 책부터 시작해도 상관없지만, 1권은 흑백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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