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대 통역대학원에서 배운 과목 중에는 ‘노트테이킹 note-taking’이 있었어요. 말 그대로 노트 작성 요령이지요. 미국인 연사의 말을 듣고 한국어로 옮기는 순차 통역을 할 때 필요한 기술입니다.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연사가 영어로 말하는 동안 핵심을 노트에 적습니다. 그걸 보고 한글 통역을 하는 거죠. 긴 이야기에서 핵심을 뽑고 논리정연하게 말의 뼈대를 세우는 것이 통역사의 일입니다. 그때 배운 노트 작성처럼, 요즘도 저는 노트를 작성합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긴 시간에서 핵심을 뽑고 내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 제가 하는 블로그의 요령이거든요.
대한민국 1호 기록학자이자 22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 [김교수의 세 가지]를 진행하시는 김익한 교수님이 쓰신 책을 읽었습니다.
<거인의 노트> (김익한 / 다산북스)
<김교수의 세 가지> 유튜브 출연 요청을 받았어요. 저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분이 쓴 책이 있나 찾아봅니다. 서로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면, 상대방에 대해 미리 알아가는데 있어 최고는 저서를 찾아보는 일이거든요.
‘기록은 단순하다. 매일의 나를 남기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고 겪고 느끼고 만나고 행하는 모든 것을 메모하면 그 메모에서 자신이 어떤 가치를 중요히 여기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을 정리해 남기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기록하면 인생이 심플해진다. 문제로 여겼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고민은 쉽게 풀린다.
“난쟁이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면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비록 지금의 내가 난쟁이일지라도 매일의 기록이 쌓이면 우리는 그 위에서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남긴 기록을 디딤돌 삼아 가장 높은 곧에 선, 거인巨人이 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거인의 노트』인 이유다.’
저 역시 기록 예찬론자입니다. 내일은 어제와 다르기를 소망하는 사람이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기록입니다. 지금 나의 꿈이 무엇인지 적어보고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 내가 기울인 노력을 적고요, 내일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적어봅니다. 머릿속에 막연하게 품고 있던 소망이 눈앞에 글로 체화하는 순간, 그 소망이 현실이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집니다.
‘기록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오랜 기간 터득한 기록의 핵심은 간단하다. 100개의 기록이 만들어졌으면 중요한 10개만 보관한다는 것이다. 기록 중에 제일 유용한 것을 골라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인데 이것을 ‘평가appraising해서 선별selecting한다’고 말한다. 즉 해당 기록이 가치 있는 것인지 평가한 다음 어떤 기록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이는 기록학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록하는 사람은 100개의 기록 중에 가치 있는 10개를 골라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요소들 중에서 빛나는 보석을 발견하는 일. 이는 분야를 막론하고 인생을 통틀어 우리가 키워 나가야 할 중요한 능력이다.’
제가 여행기를 쓰거나, 책 리뷰를 쓸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선별입니다. 여행을 다니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만나면 사진을 찍고요, 책을 읽다 인상적인 구절을 보면 필사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렇게 모은 사진과 글 중에서 더 좋은 것만 남기고 추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게 제가 블로그를 쓰는 요령입니다.
요즘 제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매일 아침 올리는 글은 ‘#내가 오늘 행복한 이유’입니다. 이건 제 방식의 감사일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의 사진 갤러리를 보며 어제 하루를 복기해봅니다. 그중 가장 즐거웠던 하나의 장면을 고르고, 글을 다듬어 SNS에 올립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다시 기록한 덕분에 저는 하루를 기분 좋은 설렘으로 시작할 수 있어요.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는데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니 적응하고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책도 읽고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는 이유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읽고 보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기록입니다.
논어의 첫 구절이지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제때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학습에서 중요한 건 배울 學보다 익힐 習입니다. 예전에 배움이 귀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 인터넷의 시대, 인강의 시대, 유튜브의 시대, 배움은 넘치는데 익힘은 귀합니다. 읽고 들어서 배운 것을 글로 적으며 내 것으로 익히는 사람이 성장하기 더 쉽습니다.
‘주체성을 찾는 가장 첫 단계는 ‘성찰’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나 자신을 돌아본단 말인가. 성찰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어떻게 성찰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성찰이라는 말이 조금 거창하게 느껴져서 ‘자기와의 대화’라고 표현하는 걸 더 좋아한다. 내면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 보는 것이 곧 자기와의 대화다. 삶이 무의미한 것 같고 자기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불안하고 억울하고 무기력하다면 기록을 통해 자기와의 대화를 시작해 보자. 자유는 자기를 만나야 시작된다.’
이 대목을 읽으며 크게 공감했습니다. 저는 10년 넘게 블로그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해왔어요. 그 덕분에 저는 나의 진짜 욕망을 만날 수 있었지요. 블로그를 보니, 나 자신이 보였거든요. 아, 나는 책을 읽고 길을 걷고 글을 쓰며 행복한 사람이구나.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이 그리 큰돈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홀가분하게 사표를 던질 수 있었어요.
기록하는 두 사람, 김익한 교수님과 제가 나눈 대화가 궁금하시다면, 유튜브 <김교수의 세가지>를 찾아보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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